막스 플랑크와 양자불연속 논쟁 – (4)양자이론과 실험 / 플랑크의 먹구름

막스 플랑크와 양자불연속 논쟁

(1) 1900년 12월 14일과 10월 19일 (2020.8.26.)
(2) 플랑크 작용 양자의 의미 (2020.9.2.)
(3) 과학혁명의 구조와 양자혁명 (2020.9.9.)
(4) 양자이론과 실험 / 플랑크의 먹구름 (2020.9.16.)

김재영 (녹색아카데미)


양자이론과 실험

양자혁명이 처음 일어난 곳은 어디인가? 막스 플랑크가 1900년 12월 14일에 자신의 논문을 읽었던 베를린 대학의 물리학연구소(Physikalische Institut)인가? 아니면 그의 연구실이 있던 이론물리학 연구소(Institute für theoretischer Physik)인가? 독일의 물리사학자 디터 호프만은 베를린-샤를로텐부르크에 있던 물리기술제국연구소(Physikalisch-Technische Reichsanstalt, PTR)가 바로 그 곳이라고 대답한다. 

이제까지 과학사 서술에서 ‘실험’이 줄곧 무시되어 왔기 때문에, 플랑크, 아인슈타인,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과 같은 이론물리학자들이 누린 영광에 비해, 정작 양자혁명을 실질적으로 (즉 물질적으로) 가져온 오토 루머(Otto Lummer, 1860-1925, 에른스트 프링스하임(Ernst Pringsheim, 1859-1917), 페르디난트 쿠를바움, 하인리히 루벤스, 빌헬름 빈 등과 같은 실험물리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정밀한 실험은 플랑크의 복사이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밀측정의 과학기술을 목표로 1887년에 설립된 PTR은 당시 새롭게 등장했던 전기조명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는 곧 실제적인 빛(조명)의 표준을 확립하고 모호함 없는 조도의 단위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열복사에 관해서는 이미 키르히호프(Gustav Robert Kirchhoff, 1824-1887)가 1860년에 흑체(schwarzer Körper)의 개념을 제안한 바 있었지만, 정작 이러한 추상적 관념이 실제적으로 실험실에서 구현되기까지는 40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다. 1897/98년에 루머와 쿠를바움은 오랜 연구 끝에 이른바 ‘전기적인 백열 완전흑체’를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림 1] 독일 물리기술제국연구소. (출처: ptb.de)

호프만의 논문은 이와 같이 실험실에서 흑체를 구현하고 이에 대해 매우 정교한 실험을 수행함으로써 흑체복사의 에너지가 온도와 파장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확정적인 데이터를 얻는 과정을 상세히 살피고 있다. 이 정교한 실험 덕분에 고온 및 장파장에서 빈의 공식이 데이터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1900년 여름이었다.

쿠를바움과 함께 이 실험결과를 얻었던 루벤스는 1900년 10월 7일에 부인과 함께 베를린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였던 친구 플랑크를 찾아갔다가 이 얘기를 꺼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플랑크는 10월 19일에 있었던 쿠를바움의 발표에 대한 논평을 준비하던 중에 자신의 유명한 공식을 얻었고, 논평에서 이 결과를 암시하는 내용을 말했다. 그로부터 6주 뒤에 다시 열린 베를린 물리학회에서 플랑크의 공식이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1900년 무렵의 흑체복사에 관한 연구에서 교과서적인 관점은 이론물리학자 플랑크의 역할을 너무 과장함으로써 당시의 실험물리학자들의 역할뿐 아니라 실험과 이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조차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밀측정을 목표로 했던 물리-기술 제국연구소의 설립이라든가, 조명산업과 관련된 엄격한 조도의 단위를 확정하려는 사회적 및 기술적 필요라든가, 루머 등과 같은 탁월한 실험물리학자들의 꾸준한 연구에 대한 언급이 없이 천재적인 이론물리학자 플랑크의 위대한 업적을 말하는 것은 과학을 신화화하고 현재와의 연관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도 있다.

플랑크의 먹구름

켈빈 경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윌리엄 톰슨은 1900년 4월 27일에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에서 “열과 빛에 관한 동역학 이론에 드리워진 먹구름”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열과 빛이 운동의 한 양식임을 주장하는 동역학 이론의 아름다움과 명쾌함은 지금 두 조각의 구름 때문에 가려져 있습니다. 하나는 지구가 어떻게 탄성체, 본질적으로 빛에테르와 같은 탄성체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에너지 분배에 관한 맥스웰-볼츠만 이론입니다.”

윌리엄 톰슨
[그림 2] 마지막 강의를 하고 있는 켈빈 경. 1899년 글래스고. (출처: ResearchGate. © National Museums of Scotland. Licensor www.scran.ac.uk.)

앞의 문제는 마이클슨과 몰리의 실험과 관련된 “에테르 속의 운동”이라는 문제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속에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1905년 탄생했고, 이는 20세기의 새로운 물리학의 중요한 기둥 중 하나가 되었다. 뒤의 문제에 대해 처음 제대로 된 답을 제시한 이가 바로 플랑크이다. 

1920년대 중반 이후에 생겨나 점점 더 힘을 얻게 된 양자역학에 플랑크는 끝까지 불신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명한 ‘과학사의 플랑크 원리’가 등장한다. 과학의 역사에서 새로운 이론이 낡은 이론을 대치해 가는 것은 어떤 특별한 합리적 기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낡은 이론을 믿는 세대가 새로운 이론을 믿는 세대로 점차 대체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플랑크 자신은 새로운 과학을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과학을 잘 이해하고 다듬어 나가는 데 언제나 더 큰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의 먹구름이 20세기 물리학에 폭풍우를 가져온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그러나 더 비극적인 폭풍우는 전쟁이었다. 가족과 학문에 대한 의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던 플랑크에게 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깊은 고뇌의 시작이었다. 1913년 베를린 대학교(지금의 훔볼트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된 직후 플랑크는 여기저기에서 소문으로 들리는 전쟁의 가능성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과학과 학문의 발전만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1914년 9월 독일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독일의 군사적 행동과 정치적 목적에 동참한다는 ‘지식인 93인 성명(Manifest der 93: Aufruf an die Kulturwelt)’이 발표되었다. 이 성명에는 아돌프 폰 하르나크, 파울 에를리히, 에밀 피셔, 프리츠 하버, 펠릭스 클라인, 빌헬름 뢴트겐 등과 더불어 플랑크의 서명이 포함되어 있다.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막 60세에 접어든 플랑크는 프로이센 과학학술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고 전쟁 중에 망가진 과학연구기관을 재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플랑크는 프로이센 문화부 장관이던 프리드리히 슈미트-오트 및 학술원의 동료 프리츠 하버와 에른스트 폰 하르나크와 더불어 “독일 과학 비상대책기구(Notgemeinschaft der deutschen Wissenschaft)”을 세우고, 독일 전 지역의 과학자들을 조직하여 지위와 정치적 관점의 차이와 무관하게 당장 시급한 재정 충당방법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26년에 퇴임한 후에도 플랑크는 매우 활발하게 다양한 강의를 기획하고 열정적으로 청중에게 물리학의 중요성을 알렸으며, 독일물리학연보(Annalen der Physik)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뮌헨에 과학기술을 전문으로 하는 박물관 도이체스 무제움(Deutsches Museum)을 설립하는 과정에 적극 참여했다.

[그림 3] 독일물리학연보 vol.532(9) 2020년 9월. (출처: Annalen der Physik)

1930년 카이저 빌헬름 협회 의장에 취임한 이후 플랑크의 남은 인생은 이 협회를 지키는 데에 바쳐졌다. 전쟁이 끝난 뒤 그 이름이 막스 플랑크 협회로 바뀐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었다. 1935년 카이저 빌헬름 협회를 위한 하르나크 하우스 연설에서 세 번이나 망설이다가 간신히 오른손을 들어 “하일, 히틀러!”라고 인사해야 했던 플랑크는 그가 믿었던 세계에 대한 합법칙적인 원리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작거나 크거나 할 것 없이, 그 안에서 자연의 법칙들이 확고하고 일관성 있게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공동생활도 높든 낮든, 고귀하든 보잘것없든 모두에게 동일한 법칙을 요구합니다. …… 그러한 성향 안에서 프로이센과 독일은 위대해졌습니다. 모국을 사랑하는 모두가 이러한 성향을 보존하고 심화시키기 위해 함께 노력할 성스러운 의무가 있습니다.”

막스 플랑크

1918년에 막스 플랑크와 더불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던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군사용 독가스 개발의 책임자였고, “평화 시에는 인류를 위해, 전시에는 모국을 위해”라는 모토를 갖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일찍 기독교로 개종했고, 스스로를 명실상부한 독일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 치하의 나치에서는 그의 혈통이 더 큰 문제였고, 독일 화학의 자부심은 1934년 망명지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앞에서 인용한 1935년의 플랑크의 연설은 다름 아니라 프리츠 하버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던 때에 그를 추모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 연설에서 플랑크가 느꼈을 슬픔과 비분을 깊이 공감할 수 있다. 

1945년 2월 23일은 플랑크의 삶에서 아마 가장 비극적이고 슬픈 날이었을 것이다. 막스 플랑크 자신도 참여했던 수요일모임(Mittwochs-Gesellschaft)이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고, 체포된 사람들이 모두 사형에 처해진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플랑크의 둘째 아들 에르빈과 죽마고우 에른스트 폰 하르나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첫째 아들이 일차대전 중에 전사하고, 쌍둥이 두 딸이 첫 출산에서 모두 세상을 떠나고, 아내조차 이른 나이에 사별해야 했던 플랑크에게 둘째 아들의 사형 소식은 정말 가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죽음의 소식을 듣는 중에도 87세의 플랑크는 약속되어 있던 대중 강연의 약속을 소중하게 지켰다. “그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을 위해, 진리와 지식 속에서 인간성을 찾아가는 노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사회적 소임을 다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플랑크의 삶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이는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말, “Sieh zu, was du tust; sag an, warum du es tust; denn die Zeit fliesst dahin.”(네가 하는 일을 지켜보라. 네가 그것을 왜 하는지 말하라. 시간이 흘러가버릴 테니)이라는 말을 플랑크가 평생 좌우명으로 여겼다는 사실과도 잘 통한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모국이 있다.” 이 말은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의 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가 2년 전 프로이센의 본 대학교에서 받은 명예박사 학위를 반납하면서 한 말이다.

양자 역학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막스 플랑크는 어땠을까? 생전에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는 것을 목도하고,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고, 나치 치하에서 카이저 빌헬름 협회 의장으로서 독일의 물리학을 지키고 대변했던 그에게 과연 모국은 무엇이었을까?

막스 플랑크의 평전

  • Hans Hartmann (1938/1948/1953/1964). Max Planck als Mensch und Denker (인간으로서 그리고 사상가로서 막스 플랑크). Siegismund.
  • Max Planck (1948). Wissenschaftliche Selbstbiographie: Mit einem Bildnis und der von Max von Laue gehaltenen Traueransprache (과학 자서전과 막스 폰 라우에의 추도사). Barth.
  • Wolfgang Gerlach 볼프강 게를라흐 (1948). Die Quantentheorie: Max Planck, sein Werk und seine Wirkung (양자 이론, 막스 플랑크, 그의 업적과 양자작용). Universitätsverlag.
  • Hermann Kretzschmar  (1967). Max Planck als Philosoph (철학자로서의 막스 플랑크) E. Reinhardt. 
  • Armin Hermann (1973). Max Planck: mit Selbstzeugnissen und Bilddokumenten (막스 플랑크, 자기증언 기록과 사진 자료들). Rowohlt.
  • John Lewis Heilbron (1986/2000). The Dilemmas of an Upright Man: Max Planck and the fortunes of German science.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정명식, 김영식 옮김 (1992). 『막스 플랑크–한 양심적 과학자의 딜레마』, 민음사.
  • Jean-Claude Boudenot, Gilles Cohen-Tannoudji (2001). Max Planck et les quanta (막스 플랑크와 양자) Ellipses Marketing.
  • Astrid von Pufendorf (2006). Die Plancks. Eine Familie zwischen Patriotismus und Widerstand (플랑크 일가, 애국심과 저항 사이에 있던 가족 이야기) Propyläen.
  • Ernst Peter Fischer (2007). Der Physiker. Max Planck und das Zerfallen der Welt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와 세계의 붕괴) Siedler; 이미선 옮김 (2010)『막스 플랑크 평전』김영사.
  • Caroline Hartmann (2008). “On Honesty Towards Nature: On the 150th Birthday of Max Planck” 21st Century Science & Technology. Fall-Winter. pp. 20-30. 
  •  Caroline Hartmann (2008) “Von der Ehrlichkeit gegenüber der Natur: Max Planck zum 150. Geburtstag” Neuen Solidarität Nr. 18/2008. https://www.solidaritaet.com/neuesol/2008/18/planck.htm
  • Dieter Hoffmann (2010). Max Planck. Die Entstehung der modernen Physik (막스 플랑크와 현대 물리학의 발전). Verlag C.H. Beck.

“막스 플랑크와 양자불연속 논쟁”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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