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 원자 모형의 탄생 1913 (2/3)

*양자역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더 많이 알려진 닐스 보어는 ‘보어 모형’이라 불리는 원자 모형을 만들었다. 보어 모형에서 전자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회전을 하는데 이 전자들의 궤도 반지름은 특정한 값만 가질 수 있다. 보어는 1913년 7월, 9월 그리고 11월 세 차례에 걸쳐 긴 논문을 발표(‘위대한 3부작’)했다. 여기에는 새로운 원자 모형 개념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쳐 탐구하게 될 보어의 “물질세계에 대한 자연철학”이 담겨있다. 다음 글은 보어의 원자 모형이 탄생하게 된 과학사적 과정에 대한 것으로, 세 번에 걸쳐 소개한다.

보어 원자 모형의 탄생 1913

(1) 덴마크의 과학자 닐스 보어, 러더퍼드를 만나다 (7/23)
(2) 코펜하겐으로 돌아간 보어, 자신의 원자 모형을 만들다 (7/30)
(3) 1913 ‘위대한 3부작’ (8/6)

김재영(녹색아카데미)
2019년 7월 30일

코펜하겐으로 돌아간 보어, 자신의 원자 모형을 만들다


케임브리지에서 5개월을 보내고 맨체스터로 옮겨온 보어가 맨 먼저 한 일은 1912년 3월 16일부터 5월 3일까지 러더퍼드의 방사능 연구 관련 세미나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50쪽에 가까운 정교한 그림과 표와 계산을 보면 보어가 매우 성실하게 방사능 연구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수학자이자 축구선수였던 동생 하랄(Harald Bohr, 1887-1951)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러더퍼드의 지도에 불만이 많음을 쉽게 엿볼 수 있지만, 보어는 충실하게 실험을 하고 세 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러더퍼드의 신뢰를 얻었다. 그 무렵 보어는 “진짜 다윈의 손자”인 물리학자 다윈(Charles Galton Darwin, 1887-1962)의 논문을 만나게 된다. 이는 알파선을 물질에 입사시킬 때 얼마나 흡수되는가에 관한 이론이었다. 보어는 이 논문에서 가정하고 있는 원자모형이 잘못되어 있다고 확신했고,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을 이용하여 전하를 띤 입자가 물질을 지나면서 속도가 어떻게 줄어드는지 매우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었다. 

보어는 1912년 7월에 코펜하겐으로 돌아갔다가 8월 1일에 마르그레테 뇌를룬(Margrethe Nørlund, 1890-1984)과 결혼했다.(그림 1) 신혼여행은 노르웨이로 갔는데, 거기에서 알파입자의 흡수이론에 관한 논문을 쓰고 썼다. 보어가 내용을 불러 주면 마르그레테가 깔끔한 글씨로 초고를 쓰면서 보어의 부족한 영어를 채워주었다.이런 방식으로 논문을 쓰는 일은 그 후에도 계속 되었고, 마르그레테는 평생 동안 보어의 공식적인 비서 역할을 했다. 1998년에 초연되어 큰 인기를 누렸고 2002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된 마이클 프레인의 희곡 “코펜하겐”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닐스 보어와 마르그레테 보어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을 만큼 마르그레테의 역할은 컸다.

<그림 1> 보어와 마르그레테의 약혼 사진, 1910년. (사진 : wikipedia)

보어는 1912년 9월부터 코펜하겐 대학의 마르틴 크누센의 조교로 일하게 된 뒤에도, 러더퍼드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1912년 12월 23일 보어가 동생 하랄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니콜슨이란 사람의 논문이 자신의 생각에 잘 맞는다는 대목이 나온다.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니콜슨(John William Nicholson, 1881-1955)은 1912년 영국 왕립천문학회 월간 학술지에 성운의 스펙트럼과 태양 코로나의 스펙트럼에서 보이는 흡수선들의 파장들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일련의 논문을 발표했다. 

뉴턴은 프리즘을 이용하여 빛이 일곱 개의 단색광의 혼합임을 밝히면서, 1671년에는 여기에 ‘빛띠’(스펙트럼)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19세기 초에 독일의 프라운호퍼가 태양 광선의 빛띠에 검은 흡수선(그림 2)이 있음을 밝힌 뒤, 분광기를 이용하여 빛띠(스펙트럼)를 관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다. 19세기 말에는 별빛의 빛띠를 분광기로 정확하게 관찰하여 기록하는 연구가 활발했다.

<그림 2> 태양 광선의 빛띠에 나타나는 검은 흡수선(프라운호퍼선). (사진: wikipedia)

1911년 발표된 러더퍼드의 논문에는 일본의 나가오카 한타로(長岡半太郎, 1865-1950)의 원자모형이 인용되어 있다. 나가오카는 1903년 12월에 도쿄에서 열린 수학물리학회에서 토성의 고리와 비슷한 원자의 행성모형을 제안했다. 양전하를 띤 입자가 중앙에 있고 그 주변에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전자들이 고리모양을 이루고 있는 모형이었다. 나가오카는 토성을 닮은 원자모형에서 전자들의 진동 때문에 빛띠의 흡수선이 나온다는 대담한 가정을 하고, 이를 실증적인 데이터로 증명하려 했다. 

니콜슨은 계의 에너지와 전자 고리의 회전진동수의 비가 플랑크 상수의 정수배라고 가정하면 알려진 흡수빛띠의 파장들을 설명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이것은 전자 고리의 회전에 대한 각운동량이 일정한 값의 정수배만 허용된다는 가정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니콜슨은 원자모형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빛띠의 흡수선들을 해명하는 데에만 주목했다. 

보어는 자신의 생각과 잘 부합하는 니콜슨의 논문을 보면서 자신의 아이디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13년 1월 31일에 러더퍼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니콜슨의 계산 결과가 관측결과와 상당히 차이를 보임을 지적하고 있다. 니콜슨은 자신의 계산이 들뜬 진공관이나 성운 같은 데에서만 나타나는 원자의 상태를 말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달리 보어는 자신의 계산이 원자의 자연스러운 모형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1913년 2월 초만 해도 보어는 빛띠의 흡수선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무렵 괴팅겐 대학에 있다가 코펜하겐에 돌아온 분광학자 한센(Hans Marius Hansen, 1886-1956)을 만났고, 한센은 발머의 공식을 상기시켰다. 한센은 1911년부터 독일 괴팅겐 대학의 포이크트 밑에서 역제만 효과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고, 1913년에 이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센은 분광학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스웨덴의 룬드 대학에 있는 뤼드베리(Johannes Robert Rydberg, 1854-1919)가 분광선의 규칙성에 대해 매우 상세한 연구를 했다는 사실을 보어에게 알려주었다. 뤼드베리는 원소들의 다양한 성질과 주기율표상의 원자수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에 평생을 바쳤다. 

1885년 스위스의 발머(Johann Jakob Balmer, 1825-1898)는 수소원자의 흡수 스펙트럼선의 파장들 사이에 독특한 수열 관계가 있음을 보였는데, 이 공식은 뤼드베리 공식의 특별한 경우에 해당한다. 보어는 대학 시절에 발머의 공식을 배운 적이 있었고, 1911년에 출판된 요하네스 슈타르크의 책 <원자동역학의 원리 제2권, 기본 복사들>에서 다시 이 공식을 확인했다. 보어는 훗날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발머의 공식을 보자마자 모든 것이 즉시 나에게 분명해졌다.”

1913년 2월 7일 헤베시(György Hevesy, 그림 3)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발전”에 대해 말하고 있다. 헤베시는 헝가리 출신의 화학자로서 동물 신진대사의 생화학 반응을 연구하기 위해 방사성 동위원소를 사용한 공로로 1943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그림 3> 죄르지 헤베시. 1885-1966. (사진: wikipedia)

보어가 헤베시를 처음 만난 것은 러더퍼드 밑에서 연구하기 위해 맨체스터로 갔을 때였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평생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헤베시가 네덜란드의 코스터와 공동발견한 새로운 원소의 이름을 하프늄(Hafnium, Hf72)이라 한 것도 이해가 될법한 일이다. 하프니아(Hafnia)는 다름 아니라 보어가 태어난 코펜하겐의 라틴어 이름이었고, 헤베시는 보어의 원자모형에 따라 양성자가 72개 있는 새로운 원소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9년에 헤베시는 런던 왕립학회가 1731년부터 “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수여하는 코플리 메달을 받았는데, 이를 노벨상보다도 더 자랑스럽게 여겼다. 보어도 1938년에 원자구조의 양자이론을 밝힌 공로로 코플리 메달을 받았다. 

1913년 3월 6일, 보어는 러더퍼드에게 수소 원자, 원자들, 분자들, 자성체 등을 다룬 바로 그 3부작 논문의 초고를 보냈다. 러더퍼드는 보어가 세세한 부분을 명료하게 설명하다 보니 논문이 너무 길어졌음을 지적하면서, 영국식은 될수록 짧고 간명하게 서술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보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급기야는 4월 초에 맨체스터로 직접 러더퍼드를 만나러 가서 논문을 줄일 수 없음을 주장했다.  

<그림 4> 원자 모형의 역사 (사진: 과학동아, 2013년 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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