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플랑크와 양자불연속 논쟁 (2) 플랑크 작용 양자의 의미

막스 플랑크와 양자불연속 논쟁

(1) 1900년 12월 14일과 10월 19일 (2020.8.26.)
(2) 플랑크 작용 양자의 의미 (2020.9.2.)
(3) 과학혁명의 구조와 양자혁명 (2020.9.9.)
(4) 양자이론과 실험 / 플랑크의 먹구름 (2020.9.16.)

김재영 (녹색아카데미)


플랑크를 과학사 명예의 전당에 굳건하게 세운 것은 그가 제시한 에너지의 작용 양자(Wirkungsquantum)라는 개념 덕분이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며 양자이론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둘러싼 과학사학자들의 견해는 갈려 있다.

프랑스의 과학사학자 올리비에 다리골에 따르면, 플랑크의 에너지 작용 양자라는 개념을 둘러싼 과학사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묶음은 물리학 교과서에 흔히 등장하는 입장으로서, 1900년에 이미 플랑크가 미소물리학적 실체들의 에너지는 특정의 띄엄띄엄 떨어진 값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도입했다고 본다.

여기에는 1919년에 초판이 나온 뒤 양자이론의 보급에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조머펠트(Arnold Sommerfeld, 1868-1951)의 교과서 『원자구조와 분광선』의 영향이 컸다. 조머펠트는 “플랑크가 [1900년에] 진동수가 𝜈인 복사에너지는 기본 에너지 양자 ε=ℎ𝜈의 정수배로만 방출 또는 흡수된다는 에너지 양자의 가설을 제안했다”라고 썼고, 그 덕분에 물리학자들은 플랑크가 양자이론을 처음 열었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훈트(F. Hund)나 요스트(R. Jost)와 같은 물리학자 출신의 역사학자들뿐 아니라 클라인(M.J. Klein)같은 중견 과학사학자들도 대개 이 견해를 큰 부담 없이 받아들여 왔다.

1978년에 출판된 토머스 쿤의 『흑체이론과 양자불연속, 1894-1912』는 양자이론의 역사적 서술에서 기념비적인 저서로 평가된다. 쿤은 이 책에서 엄밀하게는 플랑크의 에너지 양자화 가설을 양자이론의 탄생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림 1] 토마스 쿤, 1978. 『흑체이론과 양자불연속, 1894-1912』(출처: wikipedia)

플랑크가 에너지가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는 문장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고전열역학의 맥락에서였다는 것이다. 플랑크가 1900년 무렵에 (심지어는 그 이후에도) 자신이 한 연구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다는 것에는 대개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과학사학자들은 1900년을 양자이론의 탄생의 해로 보는 데에 회의적이다.

오히려 1906년에 플랑크의 가설을 실질적-물질적 의미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광전효과를 설명했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나 빛알가설이 흑체복사이론에 어떤 본질적인 역할을 했는가를 설득력 있게 논의한 파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1880-1933)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양자이론의 창시자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쿤의 주장이다.

쿤의 주장이 나온 뒤 오래지 않아 일군의 과학사학자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양자불연속 논쟁(quantum discontinuity dispute)’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논쟁은 겉보기에는 막스 플랑크가 양자이론의 효시인가 아닌가를 중심으로 여러 입장이 대립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이를 통해 양자불연속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더 심도 깊게 논의하는 마당이었으며, 여러 가지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새로운 사실들이 더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쿤으로 대변되는 둘째 묶음의 과학사학자들은 플랑크의 논문들 자체와 1948년까지 계속 나왔던 플랑크 자신의 강의록이나 회고록을 바탕으로 플랑크의 아이디어는 철저하게 고전적인 통계열역학의 맥락에서 제시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혁명적인 의미는 1908년 이후에야 비로소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즉, 플랑크는 동역학의 법칙들에 혁명을 불러일으킬 의도가 전혀 없었고 실제로 혁명적인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셋째 묶음은 이 두 강한 주장의 중간 정도인데, 플랑크는 자신의 공식이 큰 혁명을 부르리라는 것은 몰랐고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지만, 실제로 그 자신은 혁명을 가져 왔다는 견해이다. 칸그로(H. Kangro)나 네델(A. Nedell)이나 갤리슨(P. Galison) 등이 이 묶음에 속한다. 로젠펠드(L. Rosenfeld)나 야머(M. Jammer)는 첫째와 셋째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며, 플랑크 자신이나 다리골은 둘째와 셋째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것으로 기술된다.

[그림 2] 양자불연속 논쟁은 “양자불연속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더 심도 깊게 논의하는 마당이었으며, 여러 가지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새로운 사실들이 더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본문 중에서. (그림에서 왼쪽-조머펠트, 오른쪽-보어. 그림 소스: Cosmolearning)

양자불연속 논쟁이 흥미로운 까닭은 다양한 역사학자들 사이의 견해 차이가 그들이 채택하는 논변이나 역사학 방법 및 역사학적 전제 등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점 때문이다. 과학사학자들이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조금씩 다른데, 여기에는 (1) 역사 연구 상의 전통 (2) 플랑크의 1900년 논문에 나타나는 증명 (3) 통계열역학 (4) 현대적인 관점에서 플랑크를 다시 읽기 (5) 플랑크가 제시했던 목표 (6) 플랑크가 복사이론을 전개할 때 밟았던 각 단계를 형식연산 및 기호연산을 통해 찾아내려는 노력 등이 있다.

플랑크의 양자 개념이 이미 불연속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주장의 바탕에는 개별적인 발견의 평가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방법론적 질문들이 있다.

  • 역사학자가 과학적 발견에 대한 전통적인 주장에 얼마나 비중을 두어야 하는가?
  • 상세한 증명 대신에 증명의 뼈대만 간추려도 되는가?
  • 발견자가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고 생각되는 현재의 관점을 역사학자가 얼마나 받아들여야 하는가?
  • 역사학자가 발견자의 경로를 따라가는 정도는 어느 정도이어야 하는가?
  • 발견자의 경로에서 나타나는 형식적 및 기술적인 상세함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써야 하는가?

쿤은 막스 플랑크의 연구에 내부 모순이 없었고 시간적으로도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1900년에는 양자불연속이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문헌상의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다리골은 플랑크의 접근이 약한 의미에서 정합적이긴 했지만 강한 의미로 무모순성이나 완전성을 갖춘 것은 아니었음을 강조하면서, 플랑크는 자신이 제안한 새로운 양자라는 개념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명료한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양자불연속 논쟁의 일단락을 짓고 있다.


(3) 과학혁명의 구조와 양자혁명”으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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