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과 전체, 원자물리학을 둘러싼 하이젠베르크의 대화들 (4)


부분과 전체, 원자물리학을 둘러싼 하이젠베르크의 대화들

(1) 하이젠베르크, 양자역학, 부분과 전체. 2020년 7월 15일
(2) 하이젠베르크의 청년 시절, 이론물리학과 원자이론. 2020년 7월 22일.
(3)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독일 최연소 대학교수. 2020년 7월 29일.
(4) 서른 살의 노벨상, 전쟁 속의 하이젠베르크. 2020년 8월 5일.
(5) 코펜하겐 1941년, 왜 부분과 전체일까? 2020년 8월 12일.

김재영 (녹색아카데미)


서른 살의 노벨상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최연소 정교수 취임에 이어 1933년에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1932년에는 노벨물리학상을 누구에게 줄지 정하지 못한 채 수상자 선정이 한 해 늦춰졌다. 1933년 11월 9일에 발표된 193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는 하이젠베르크였고, 1933년 노벨물리학상은 디랙과 슈뢰딩거가 1/2씩 상금을 나누게 되었다.

이것은 1922년의 상황과 유사하다. 1921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정하지 못해서 1922년에 아인슈타인이 1921년에 해당하는 상을, 보어가 1922년치를 받는 바람에 보어와 아인슈타인이 같은 해에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

[그림 1] 슈뢰딩거(왼쪽)와 하이젠베르크(오른쪽), 스웨덴 왕(가운데). 1933년 노벨상 수상식. (출처: Maryland University. 사진: Scanned at the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 Emilio Segre Visual Archives.)

이제 하이젠베르크의 노벨상을 상세하게 살펴보자. 하이젠베르크의 공식적인 업적은 “양자역학을 창안하고 이를 응용하여 특히 수소의 동소체 형태를 발견하게 한 공로”이다.

이에 비해 193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슈뢰딩거와 디랙의 공동업적은 “원자이론의 새로운 생산적 형태를 발견한 공로”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노벨상 위원회는 양자역학을 창안한 공로를 오롯이 하이젠베르크에게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표준적인 물리학사에서 양자역학의 결정적 계기가 된 논문이 세 편 있다. 먼저 1926년 2월 4일에 출판된 막스 보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파스쿠알 요르단 세 명의 공동논문 “양자역학에 관하여 II”는 행렬을 이용한 가장 체계적인 양자역학의 틀을 보여준 논문이다. 이 논문은 흔히 ‘삼인작’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보다 앞서 폴 디랙이 “양자역학의 기본 방정식”이란 제목의 논문을 1925년 12월 1일에 출판했다. 끝으로 1926년 3월 13일에 출판된 에르빈 슈뢰딩거의 논문 “고유값 문제로서의 양자화”가 있다. 슈뢰딩거의 이론은 당시 파동역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실제적인 많은 난제들이 파동역학으로 해결되었다.

양자역학을 처음 만든 공로로 노벨상을 주고자 한다면 보른, 하이젠베르크, 요르단, 디랙, 슈뢰딩거 중 누구에게 가장 큰 공로가 있다고 해야 할까. 막스 보른은 1954년 노벨상을 받기까지 1930년부터 모두 34회 후보에 올랐다. 하이젠베르크도 1928년부터 1933년까지 무려 29회나 후보에 추천되었다. 보어는 1931년부터 매년 하이젠베르크를 추천했다.

하지만 1933년에 하이젠베르크를 추천한 사람이 무려 10명이다. 1932년에도 7명이 추천했다. 1932년 몫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준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하이젠베르크의 공로에서 덧붙여진 것은 “수소의 동소체 형태를 발견하게 한 공로”이다. 단순히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기존에 이해하기 어려웠던 현상들을 말끔히 설명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은 그 새로운 이론을 통해 이제까지 없던 현상을 예측하여 확인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연구가 새로 제안된 양자역학을 헬륨 원자에 적용하여 헬륨 두 가지 동소체, 즉 파라헬륨과 오르토헬륨을 설명한 논문이다. 하이젠베르크가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직 제안을 마다 하고 코펜하겐으로 가서 보어의 연구원으로 있을 때 했던 연구였다.

[그림 2] 수소 동소체. 오르토수소와 파라수소의 구조. (출처: wikipedia)

전쟁 속의 하이젠베르크

1930년대에 물리학자로서의 하이젠베르크의 삶은 평온했다. 이 책의 10장과 11장을 보면 양자이론과 현대물리학이 안고 있는 철학적 문제들과 여러 분과 과학들 사이의 관계와 같은 학구적인 대화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12장과 13장처럼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당의 집권으로 암울했던 사회상을 둘러싼 진지한 대화도 등장한다.

특히 1933년 이후 반유대주의에 따라 많은 과학자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쫓겨나야 했던 상황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유대인의 물리학으로 낙인찍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나치주의자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937년 7월에는 SS 친위대의 수장 하인리히 히믈러가 파멸되어야 할 유대인을 비호한다는 이유로 하이젠베르크를 ‘백인 유대인’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이차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엔리코 페르미와 나눈 대화(14장)는 당시 하이젠베르크의 상황을 잘 말해 준다. 하이젠베르크는 괴팅겐 대학에서 보른의 조수를 하며 강의를 할 때 페르미를 만났다.

페르미는 193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으러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갔다가 귀국하지 않고 바로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에서 반유대인법이 그 해 11월에 발효되었고, 페르미는 유대인이었던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미국행을 결정했다.

1939년 7월, 하이젠베르크는 미국을 방문하여 두 주 동안 시카고 대학에서 힘겨운 연속강연을 마친 뒤 앤 아버로 가서 사무엘 하우츠미트의 집에 머물렀다. 하우츠미트는 울렌벡과 함께 전자의 스핀이라는 아이디어를 낸 네덜란드의 물리학자로 미국으로 망명한 뒤 미시건 대학의 교수로 있었다.

[그림 3] 왼쪽부터 사무엘 하우츠미트, 클레런스 요아쿰(당시 미시건대 부총장),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엔리코 페르미, 에드워드 크라우스(광물학자). 1939년 앤 아버 미시건대학에서. (출처: Nature)

페르미는 하이젠베르크에게 나치가 지배하는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와서 물리학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책의 14장에서 “나는 그냥 유럽에 남아 과학을 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을 주변에 모아 데리고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이들이 다시금 독일의 과학계를 재건하게끔 돕기로 결정했어요. 이런 젊은이들을 내버려두고 떠난다면 배신하는 기분이 들 거예요.”라고 대답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함께 있던 하우츠미트의 기억은 조금 다르다. 그에 따르면,  미국으로 오라는 하우츠미트와 페르미의 권유에 하이젠베르크는 “그럴 수는 없어요. 독일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함께 있던 미시건 대학의 학생의 기억으로는 옆에 있던 페르미의 부인이 “누구든 유대인을 미워하는 독일에 남아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미친 사람일 거에요.”라고 말하자, 하이젠베르크가 격렬하게 반대했고 강한 애국심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차대전의 발발로 독일의 모든 남자들이 군대에 징집되었는데, 하이젠베르크도 예외가 아니었다. 라이프치히 대학 물리학과에서 7명이 군장을 꾸려 떠나야 했다. 그나마 최전선이 아니라 베를린의 후방부대로 가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독일로 돌아간 하이젠베르크도 징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9월 26일 바이츠제커와 함께 베를린 육군병기국에 도착한 하이젠베르크는 “나는 다른 물리학자들과 더불어 원자에너지를 기술적으로 활용하는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다.”라고 회고한다. 그 비공식 이름은 ‘우라늄 클럽Uranverein’이었다.

[그림 4] 알소스 미션(하우츠미트가 과학자문 수석) 소속의 미국, 영국 과학자들이 1945년 독일의 실험용 원자로를 해체하고 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남서쪽으로 50km 떨어진 하이거로흐. (출처: wikipedia)

1939년 1월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은 핵분열을 발견했다는 논문을 제출했다. 우라늄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켰는데 바륨 원자핵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한은 이 논문을 발표하기 전에 결과를 스웨덴으로 망명해 있던 리제 마이트너에게 보냈고, 마이트너와 오토 프리슈는 이것이 연쇄반응이 될 수 있음을 계산하고 실험으로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1939년 4월 독일 제국교육부의 빌헬름 다메스를 중심으로 ‘우라늄 클럽’이 만들어졌다. 오토 한, 발터 보테, 쿠어트 디프너 등이 주축이 된 1차 모임에서 주된 관심을 ‘우라늄 기계’ 즉 핵반응로를 건설하는 데 있었고, 겉으로는 핵반응로를 이용하여 막대한 에너지를 얻는 것이 목표라고 내세우고 있었다. 핵무기와는 직접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5) 코펜하겐 1941년, 왜 부분과 전체일까?”로 계속됩니다.


알림

* 이 글은 2016년에 출간된 <부분과 전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유영미 옮김, 서커스)에 실린 감수의 글을 위한 초고를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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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