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과 전체, 원자물리학을 둘러싼 하이젠베르크의 대화들 (3)


부분과 전체, 원자물리학을 둘러싼 하이젠베르크의 대화들

(1) 하이젠베르크, 양자역학, 부분과 전체. 2020년 7월 15일
(2) 하이젠베르크의 청년 시절, 이론물리학과 원자이론. 2020년 7월 22일.
(3)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독일 최연소 대학교수. 2020년 7월 29일.
(4) 서른 살의 노벨상, 전쟁 속의 하이젠베르크. 2020년 8월 5일.
(5) 코펜하겐 1941년, 왜 부분과 전체일까? 2020년 8월 12일.

김재영 (녹색아카데미)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만남

<부분과 전체> 3장에는 하이젠베르크가 1922년에 처음 보어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리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기도 한 이 만남을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뮌헨 대학에는 이미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파울리가 이론물리학자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하이젠베르크도 결코 거기에 뒤지지 않았다. 조머펠트는 탁월한 연구자였을 뿐 아니라 매우 훌륭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에게 좋은 연구경험을 쌓게 하는 데에 큰 관심을 가졌다.

1922년 괴팅겐 대학에서 열린 ‘보어 축제’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수학에 큰 관심을 가졌던 의사 파울 볼프스켈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 사람을 위해 당시 10만 마르크라는 막대한 상금을 남겼다. 이 상금은 괴팅겐 왕립과학학술원에게 맡겨졌는데, 당시 독일의 가장 저명한 수학자 힐베르트가 그 재원의 운용을 맡게 되었다.

힐베르트는 매우 현명한 수학자였다. 페르마의 정리를 다루는 정수론의 좁은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수학과 수학을 응용한 여러 분야에서 가장 독보적인 학자들을 괴팅겐 대학에 초청해서 강연을 하게 했다. 보어의 강연은 바로 그 재원 덕분에 가능했다. 1922년 보어가 괴팅겐 대학에서 원자이론에 대해 강연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림 1] 보어 페스티벌. 1922년 괴팅겐. 왼쪽에서 두 번째로 서있는 사람이 닐스 보어, 의자에 앉은 사람은 막스 보른이다. (출처: akgimages)

일차세계대전 때 독일에서 93인의 예술, 문학, 과학 분야의 지식인들이 독일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정당했다는 선언을 했다. 그런 만큼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독일 과학계에 보내는 다른 나라 과학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러나 보어는 오히려 이런 상황일수록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고, 괴팅겐 강연은 그런 보어의 신념이 빚어낸 멋진 작품이었다.

괴팅겐 대학의 가장 큰 강의실은 원자이론의 대가가 펼치는 강의를 듣기 위해 모여든 교수들과 학생들로 가득 찼다. 그 중 하나가 조머펠트를 따라온 젊은 하이젠베르크였다. 이 이야기는 이 책의 3장에서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조머펠트는 우수한 학생들에게 다양한 학문적 기회를 주기 위해 매우 노력하는 훌륭한 교육자였다.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은 하이젠베르크를 그 중요한 자리에 데려간 것도 하이젠베르크에게 좋은 기회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두 주 동안 진행된 강의의 첫 번째 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독일대학에서는 교수가 강의를 하고 있는 동안 질문을 하거나 강의내용을 비판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볼프스켈 특별강연으로 외국에서 초청해 온 저명한 물리학자의 강연이었으니 다들 이해하지 못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 척 하는 분위기였다.

보어의 세 번째 강연 내용은 코펜하겐 연구소의 연구원 크라머스와 보어가 함께 발표한 논문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청중 속에서 한 청년이 벌떡 일어나 그 접근은 틀렸고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비판하기 시작했으니, 술렁이는 청중들과 당황한 강연자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조머펠트의 세미나에서 보어와 크라머스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고 단점과 한계를 심각하게 토론한 적이 있는 하이젠베르크는 거침없이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갔다. 예의 바르고 사려 깊은 보어는 그의 유명한 말 “아주 흥미로운 주장입니다. 하지만…”으로 대답을 시작했지만, 당황스런 기색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보어는 그 학생이 누군지 알아보려 했는데, 다름 아니라 독일의 동료 연구자 조머펠트가 데려 온 학생임을 알고 놀랐다. 함께 학교 옆 숲을 거닐며 그 질문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이 젊은 친구가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공식 강의가 없는 다음 날은 조머펠트와 그 젊은 친구를 자신이 머물고 있는 숙소로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소 오만하지만 자신감이 넘치고 패기만만한 청년이었던 하이젠베르크는 집안의 기대를 크게 받고 있었고, 이 무렵의 심경을 상세하게 편지로 써서 부모님에게 보냈다.

그는 자신의 질문과 비판에 이 저명한 물리학자가 당황하면서 따로 불러 이야기를 듣고 심지어 지도교수를 함께 불러 이야기를 나눈 것이 너무나 기뻤다. 흥미롭게도 보어 자신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었다. 결국은 하이젠베르크의 비판이 틀린 것이었지만, 보어는 새로운 것을 밝히려는 젊은 물리학도의 용기를 북돋아주려 했던 것이었다.

독일 최연소 대학교수

하이젠베르크는 1927년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정교수로 부임했다. 뮌헨의 루트비히-막스밀리안 대학에 입학한 것이 18살이던 1920년 가을이니까, 대학 입학 후 겨우 7년 만인 스물여섯 살에 독일역사상 최연소로 정교수가 된 것이다. 그만큼 탁월한 물리학자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보다 당시 타이밍이 정말 절묘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1926년 초에 독일어권 대학들에서 갑자기 교수자리가 우루루 쏟아졌다. 라이프치히 대학의 게오르게 체칠 야페가 기센 대학으로 옮겨가면서 부교수 자리가 하나 생겼다. 그 해 10월 1일에 막스 플랑크가 은퇴하면서 베를린 대학에 정교수 자리가 생겼다. 그로부터 한 주 뒤 라이프치히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 테오도르 데쿠드레가 갑작스런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고, 얼마 되지 않아 그 근처 할레 대학의 이론물리학자 카를 슈미트도 은퇴했다. 세 달 뒤 1927년 1월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실험물리학 교수 오토 비너도 갑작스런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물리학 연구가 활발하던 나라에서 졸지에 교수 자리가 쏟아진 것이다. 독일의 대학의 교수직은 원하는 사람이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적절한 후보를 찾아 교수 자리를 제안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926년 4월에 야페의 뒤를 이을 라이프치히 대학 이론물리학 부교수자리의 후보로 오른 사람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 그레고르 벤첼의 순이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1926년 5월 1일부터 코펜하겐의 이론물리학연구소로 가서 크라머스의 후임으로 보어의 조수 겸 코펜하겐 대학 강의를 맡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그림 2] 왼쪽부터 볼프강 파울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엔리코 페르미. 1927년 이탈리아 코모 컨퍼런스에서. (출처: CERN)

하이젠베르크는 4월에야 뒤늦게 보어에게 재정지원에 대해 물어보는 편지를 보냈고, 보어는 매우 서둘러서 하이젠베르크의 급여를 올려주겠다는 전신을 보냈다. 당시 독일의 학계에는 젊은 학자가 대학에서 제안한 교수직을 응낙하지 않으면 한 동안 다른 대학에서도 그 학자는 후보에서 제외되는 관례가 있었다.

아들이 교수가 되는 것을 소원으로 삼고 있던 하이젠베르크의 아버지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제안을 응낙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괴팅겐의 막스 보른과 리하르트 쿠랑에게 상의했다. 둘 다 보어와 함께 일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대답을 보내왔다.

그 무렵 하이젠베르크는 베를린 대학의 막스 폰 라우에의 초청으로 콜로키움을 하게 되었고, 베를린 대학에 포진해 있던 기라성 같은 물리학자들(아인슈타인, 네른스트, 라우에, 마이트너, 라덴부르크)은 라이프치히 대학의 제안을 거절하고 코펜하겐으로 가라는 충고를 주었다. 이 때 하이젠베르크가 아인슈타인을 만나 나눈 매우 흥미로운 대화가 이 책의 5장이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하이젠베르크는 아인슈타인과 양자이론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전이확률Übergangswahrscheinlichkeit’이라는 단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 계산할 수 있는 양이 ‘전이확률’임을 처음 제안하고 주장한 사람은 막스 보른이며, 그 논문은 1926년 6월 25일에 투고되었다.

막스 폰 라우에가 베를린 대학의 콜로키움에 하이젠베르크를 초대한 것은 4월이었고,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보른의 통계적 해석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1926년 10월 19일에 파울리가 하이젠베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른의 통계적 해석을 설득하고 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1927년 3월 19일에 보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확률 해석에 대해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하이젠베르크가 1969년에 출판된 이 책에서 1926년 4월에 이미 아인슈타인과 전이확률에 대해 말했다는 것은 올바른 기억이 아니다. 그런데 독일어에서 Wahrscheinlichkeit는 확률만이 아니라 개연성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전이확률’이라는 명시적 표현 대신 ‘옮겨갈 개연성’이라는 추상적인 표현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림 3] 강의 중인 하이젠베르크. 1936년. (출처: Philosophical Library)

파울리는 함부르크 대학에서 정교수 자리를 막 얻은 때여서 라이프치히 대학의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벤첼이 라이프치히 대학의 이론물리학 부교수로 부임했다. 이 상황을 가장 슬퍼한 것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할아버지 베클라인 하이젠베르크였다. 대학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외국의 작은 연구소의 연구원 자리를 택한 손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듬해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베르너의 슬픔은 더 컸다.

1927년 6월 할레 대학의 인사위원회에서 카를 슈미트의 후임으로 하이젠베르크, 벤첼, 프리드리히 훈트를 추천했고, 조머펠트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데쿠드레의 후임으로 하이젠베르크를 거론하고 있다고 하이젠베르크에게 알려주었다.

그 무렵 막스 플랑크가 은퇴한 베를린 대학으로 조머펠트와 슈뢰딩거가 추천되었다. 조머펠트가 이 제안을 사양하자 바이에른 교육부는 바이에른을 떠나지 않은 조머펠트의 급여를 인상하는 동시에 오래 전부터 조머펠트가 요청했던 이론물리학 부교수 자리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비록 부교수 자리였지만, 하이젠베르크는 뮌헨과 자신의 모교를 매우 사랑했고 조머펠트가 은퇴하면 그 후임이 될 것이 분명했다.

1927년 7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식적으로 교수직 제안이 왔다. 이제 하이젠베르크는 세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할레 대학 정교수인가, 라이프치히 대학 정교수인가, 뮌헨 대학 부교수인가.

그 대목에서 보어의 태도도 멋지지는 않았다. 자신의 미래를 찾아 떠나려는 젊은 연구자를 보내 주기 싫어서 코펜하겐 대학 정교수 자리를 보장하지도 않으면서 잡아끄는 모습이었다.

결국 하이젠베르크는 라이프치히 대학을 선택했다. 베를린 대학에는 플랑크의 후임으로 슈뢰딩거가 갔고, 벤첼은 슈뢰딩거의 후임으로 취리히 대학으로 갔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벤첼의 후임은 훈트가 되었다.

파울리가 드베이어의 후임으로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으로 옮기면서 함부르크 대학에서 파울리의 후임으로 요르단이 부임했다. 하이젠베르크가 코펜하겐에서 맡았던 이론물리학연구소 연구원(즉 보어의 조수)이자 코펜하겐 대학의 강사 자리는 오스카르 클라인에게 돌아갔다.


* 이 글은 2016년에 출간된 <부분과 전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유영미 옮김, 서커스)에 실린 감수의 글을 위한 초고를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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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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