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도시이야기1 – 알렉산드리아


오늘의 이야기는 가디언지에서 2016년 총 52회에 걸쳐 연재했던 <도시이야기>(The story of cities)의 첫 편, 알렉산드리아 이야기입니다.

“그림으로 읽는 『역사 속의 도시』 ” (멈포드의 1961년 저작 『The City in History』)를 읽어가는 중간중간 재밌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들의 이야기도 함께 전해보려고 합니다.


[그림 1]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더 대왕(왼쪽)과 다리우스 3세. 이 전투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제국을 실질적으로 멸망시켰다. (출처: Wikipedia)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치고 난 후 그의 방에서 호머의 책을 발견합니다. 그 이후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도 정복합니다. 어느날 왕의 꿈에 나타난 호머가 그의 저작인 <오딧세이>의 한 구절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에 지중해에 위치한 이집트의 파로스 섬이 등장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바로 다음날 파로스를 방문하고 둘러본 후 그곳에 도시를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이곳이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수많은 전설이 담겨 있습니다. 이 도시는 세계의 이야기를 한 곳에 모으는 일을 시도했고, “위대한 인간 정신의 도가니”였으며, “돌덩이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으로 만들어진 도시”(Justin Pollard and Howard Reid. 『The rise and fall of Alexandria』. 2007.)였습니다.

[그림 2]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는 “가장 위대한 인간 정신의 도가니”였다. (그림: Hulton Archive/Getty Images. 출처: 가디언)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등대, 도서관과 박물관으로 유명하지만 당대의 생활에 도시가 끼친 영향은 이 도시의 계획에서 시작합니다. 당시 알렉산더 대왕이 지명한 건설책임자 디노크라테스는 위대한 격자구조(gridiron)를 구현했습니다. 이 구조는 공적공간과 사적공간을 엮었고 공간과 기능을 엮었으며 땅과 바다까지 엮어냈습니다.

디노크라테스는 실물 크기로 도시 모양을 표시하기 위해 보리가루를 사용했는데, 일을 제대로 해내기도 전에 바다새들이 날아와 설계도를 쪼아먹고 훔쳐먹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보고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으로 도시를 만드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들을 했지요. 그러나 디노크라테스 장군의 예언자는 새들이 이 도시로부터 먹이를 먹는 것은 훗날 알렉산드리아가 세계 전체를 먹여살릴 징조라고 달리 해석했습니다.

[그림 3] 알렉산드리아. 두개의 항구. 당시 도시계획을 위해 보리가루를 이용해 실물크기로 상세계획을 표시했다. (그림: NYPL. 출처: 가디언)

알렉산드리아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궁전, 그리스신과 이집트 신을 위한 신전, 전통적인 광장 등이 들어섰고 시장과 공적인 모임을 위한 장소도 만들어졌습니다. 주택과 방어를 위한 벽도 건설되었습니다. 신선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나일강으로부터 용수로를 만들고 주요도로 지하로 실개천도 흐르게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디노크라테스의 알렉산드리아 도시계획은 그가 잘 알고 있던 그리스 도시들의 전형적인 패턴을 가져와 베껴 붙이는 일이었습니다. 디노크라테스의 스승인 히포다무스는 피레아스(Piraeus)에 위대한 아테네 항구를 책임지고 건설했던 사람이었고, 그는 도시계획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림 4] 피레아스 격자형 도시계획.  페리클레스 왕을 위해 히포다무스가 기원전 5세기경 설계했다. 히포다무스는 디노크라테스의 스승이었으며, 격자형 도시설계의 창시자이다. (출처: Wikipedia)

아리스토텔레스는 히포다무스를 “도시를 그려내는 기술을 고안해낸”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칭찬은 거기까지였고, 그를 ‘아주 잘난 체하고’, ‘머리를 늘어뜨리고’ ‘비싼 장신구’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히포다무스와 그의 제자들은 도시를 설계한다는 것은 단순히 경계를 그려내는 것 이상이라고 믿었습니다. 계획가들은 마을이 어떻게 기능할 것인지, 논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도 생각해야한다고 믿었지요.

히포다무스의 눈에는 길이라는 것이 집과 가게들이 자리잡고 나서 생기는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가지는 중심점(center-points)이었고, 도시 거버넌스가 효율적으로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히포다무스가 기존의 도시에서 단편적인 조각 사업들을 한 반면, 디노크라테스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빈 캔버스를 부여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스승의 혁신을 전례없는 큰 규모에 실현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죠.

디노크라테스의 천재성은 격자구조에서 더 나아가 물 위로까지 뻗어나갔습니다. 그는 너비 600피트(183미터) 되는 육교(land bridge) 헵타스타디온을 만들었습니다. 육지와 섬을 잇는 이 다리는 당시 그리스 아네테 경기장 길이의 7배였고, 제방 양쪽으로 거대한 항구 2개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림 5] 파로스섬과 육지를 잇는 헵타스타디온 다리. (출처: Magdy Torab, 2013. Researchgate)

알렉산드리아의 성공은 그리스뿐만 아니라 이집트에도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와 호머 이야기도 전해지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 도시의 위치를 정하는 데는 지역 지식(local knowledge)도 틀림없이 사용되었을 겁니다. 

비교적 고립된 내륙의 이집트 파라오 왕국과, 해상교역 제국인 그리스와 지중해 너머 세계를 이 새로운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결합해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도로의 방향은 시원한 바닷바람이 최대한 잘 순환되게 놓였고 건물들은 서쪽과 동쪽 건축물들이 잘 혼합될 수 있도록 지어졌습니다.

유명한 파로스 등대의 팔각 벽은 오늘날까지도 이집트 전역에 이와 유사한 첨탑으로 재현되고 있고, 17세기 영국의 크리스토퍼 렌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림 6] 파로스등대. 기원전 280년. (그림: Universal Images Group/Getty. 출처: 가디언)
[그림 7] 크리스토퍼 렌 교회들 중 하나. St Edmund the King & Martyr교회. 런던 롬바르드 거리. (출처: Wikipedia)

도시 건설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부와 명성은 급상승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무세이온(musaeum), 즉 ‘뮤즈의 사원’이었습니다. 모든 학문 분야의 선구적인 학자들을 무세이온으로 불러모았고, 사원 내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이 도서관은 정부의 명령으로 항구로 들어오는 모든 배들을 뒤져 책을 압수해 도서관에 보관할 권한이 있었죠.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 자신은 이 위업을 결코 볼 수 없었습니다. 디노크라테스가 보리가루를 이용해 도시계획을 시작한 직후 왕은 이집트 서쪽 깊은 사막에 자리한 시바로 예언자를 만나기 위해 떠나버렸고, 그 후에는 또다시 전쟁을 하기 위해 페르시아와 인도로 갔기 때문입니다. 10년 후 그는 바빌론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림 8]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출처: Wikipedia)

그의 이집트 후계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마케도니아로 향하던 알렉산더 대왕의 시체를 가로채 알렉산드리아로 가져와 거대한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죽은 알렉산더 대왕의 운명은 알렉산드리아의 어두운 면을 보여줍니다. 대왕은 지적인 노력이나 도시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적었으며, 도시를 그저 통치의 수단으로 바라본 사람이었습니다. 

문화와 지적인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의 권력을 더욱 정당화하기 위해 죽은 알렉산더 대왕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그리스 도시들은 폴리스로 남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자율적인 시민들이 동등하게 결정권을 행사하기를 원한 폴리스와는 달리 알렉산드리아는 도시 전체주의의 원형이었기 때문입니다. 엄격하게 구획되고 경계지어진 알렉산드리아는 위로부터의 명령에 의한 도시였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도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림 9] 18세기 알렉산드리아. Luigi Mayer 
(출처: wikipedia)

“오래된 도시 드라마에서 남겨진 것이라곤 그저 대단한 눈요기거리밖에 없었다. …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는 시민 한사람 한사람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도시(알렉산드리아)에서 시민들은 명령에 따라 지도자가 하는 말을 그저 수행했을 뿐이다.”

『역사 속의 도시』. 루이스 멈포드. 1961.

알렉산드리아의 외형에 너무나 완벽하게 체화된 이런 형식적인 명령과 아름다움이, 한때는 도시에 깊이 내재되어 있던 ‘실제세계의 혼란스러운 자유’를 해체시켰다고 멈포드는 보았습니다. 

도시 설계가 섬기는 대상이 지배자인가, 거주하는 시민들인가에 대한 갈등과 긴장은 수 세기 동안 지속되어 왔고 오늘날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몇 년 전부터 대규모 저항과 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크고 인구는 거의 5백만 명에 달하는 알렉산드리아는 여전히 도시계획이 어떠해야하는가하는 주제에서 맨 앞에 서 있습니다.

2015년 드러난 알렉산드리아 도시계획에는 고대 파로스 등대의 원래 자리에 새로운 대형 쇼핑몰과 고급 호텔을 짓는 대규모 재개발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복잡한 비공식적인 경제와 부서지기 쉬운 건축물 역사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으며, 거주자들의 동의없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비판받았습니다.

[그림 10] 현재의 알렉산드리아. (사진: Getty Images/Robert Harding World Imagery. 출처: 가디언)

“알렉산드리아의 풍부한 문화 역사를 증폭시키는 일과는 무관하게 현실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공익을 희생시켜가면서 이 도시의 역사는 무자비하게 상업화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 Amro Ali. 이집트 도시정책 분석가.

고대 파로스등대가 완공된 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파로스 해안에 처음으로 서서 그의 위대한 메트로폴리스를 짓기로 결정한 후 수 십 년이 지나서였습니다. 등대를 설계한 소스트라투스(Sostratus)는 관습에 따라 등대 입구 가까이 명판에 이 등대를 이집트 왕족에게 바친다고 새겼습니다.

동시에 그는 명판 아래쪽에 몰래 두 번째 새김을 남겼습니다. “바다를 항해한 모든 이들에게 바친다.” 도시 공간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기사 원문 보기 :
“The story of cities, part 1: how Alexandria laid foundations for the modern world.” The Guardian. 2016. 3. 14. Jack Shenker.

번역, 요약 :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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