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탈인간중심, 툴루세 – (3)툴루세에서 불편하더라도 함께 살기

“인류세, 탈인간중심, 툴루세” 시리즈의 마지막 편입니다. (1)에서 인류세의 개념을 상세하게 검토하고, (2)에서 우주와 자연사에 대한 과학의 역사에서 전개된 탈인간중심주의 전통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3)편에서는 다나 해러웨이가 제안한 ‘툴루세’의 개념과 내용을 중심으로 인류세라는 이름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해봅니다.

“인류세, 탈인간중심, 툴루세”

1.인류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20. 4. 28.
2.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멀어져 온 과학의 역사. 2020. 5. 6.
3. 툴루세에서 불편하더라도 함께 살기. 2020. 5. 13.

김재영 (녹색아카데미)


도대체 이 거대한 지구에서 인간이 정말 모든 것을 좌우할 만큼 막강한 힘을 갖고 있긴 할까? 1980년대에 쓴 「사이보그 선언 A Cyborg Manifesto: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으로 유명한 여성주의 철학자 다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인류세나 자본세라는 용어가 가지는 인간중심주의에 이의를 제기한다. 

현재 지구라는 시스템 전체가 인류가 만들어낸 위기 속에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단순히 기후변화라는 이름에 묻힐 수 없는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해러웨이는 독성 화학물질, 채굴, 핵오염, 호수와 강과 지하수의 고갈, 생태계의 단순화, 사람들과 다른 생명체들의 엄청난 몰살 등과 같은 것이 지구 시스템 전체를 붕괴시키고 또 붕괴시키고 또 붕괴시킬 것임을 역설한다.

[그림 1] 다나 해러웨이. (1944~) (출처: wikipedia)

그러나 지구 시스템의 상상할 수 없는 복잡성과 예측불가능함을 염두에 둔다면, 이 위기의 시대를 단순히 ‘인류세’라 부르는 것은 인간의 능력과 영향에 대한 과대평가가 될 것이다. 이 거대한 지구 가이아 앞에서 인류의 막대한 힘도 사실 한 요소일 뿐임을 직시해야 한다.

해러웨이가 ‘인류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이름은 ‘툴루세Chthulucene’이다. 이 말은 chthulu와 cene을 붙여 만든 신조어이다. chthulu는 chthonic 또는 chthonian이란 단어와 연관된다. 이 단어들은 그리스어 크토니오스(χθόνιος, khthonios)에서 온 것이다.

그리스신화에서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지옥의 신 타르타로스 사이에 태어난 크토니오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다만 이 말은 땅속에 사는 신화적인 존재들을 가리킨다. 그러니 실상 도깨비나 저승사자나 지렁이나 두꺼비나 심해어일 수도 있다. 

해러웨이는 2015년의 논문에서 자신이 말하는 Chthulucene이란 이름이 은둔적인 작가 러브크래프트(H.P. Lovecraft)의 과학소설에 나오는 크툴루Cthulhu에서 나온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림 2] 크툴루(Cthulhu). 러브크래프트의 1928년 소설 “”The Call of Cthulhu“에 등장한다. (출처: wikipedia)

“이 실제의 시간-공간과 가능한 시간-공간의 이름은 과학소설 작가 H.P.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혐오주의자이며 인종주의적인 악몽 같은 괴물 크툴루를 따라 붙인 것이 아니다. 철자가 다름에 주목하라.”

2016년 여름에는 논문과 강연에서 말하던 이야기를 묶어 의미 있는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그 제목은 『말썽거리와 함께 살아가기: 툴루세에 친족 만들기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이다. 해러웨이의 새로운 책이 나오자, 그해 11월에 흥미로운 서평이 인류학 관련 웹진인 Savage Minds에 실렸는데, 그 서평을 쓰고 있는 서평자의 이름이 Cthulhu다. 툴루세를 제안하는 해러웨이의 책에 대해 크툴루 자신이 목소리를 내고 있는 설정이 흥미롭다. 

 “내가 왜 여기에 소환된 걸까. 이 툴루세라는 게 뭐지? 괴물(monster)은 일종의 경고이다. ‘증명하다(demonstrate)’와 같은 단어는 그 ‘괴물’이라는 말과 어원을 공유한다. 해러웨이는 자신의 ‘툴루세’를 만들기 위해 크툴루에 피상적인 h를 하나 덧붙임으로써 나의 부하들을 미리 차단해 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해러웨이는 이것을 부정한다. 슬프게도 본문과 각주 여러 곳에서 나를 인종주의자이며 여성혐오자라고 몰아세우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모든 이들의 괴로움에 똑같이 무관심하다.”

그러면 해러웨이가 말하는 툴루세를 대표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해러웨이가 말하는 그 땅 속의 것들은 가령 ‘나가’*, ‘가이아’, ‘탄가로아’, ‘테라’, ‘하니야스-히메’, ‘거미 여인’, ‘파차마마’, ‘오야’, ‘고르고’, ‘레이븐’, ‘아아쿨루주시’, ‘메두사’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잡다할 수도 있는 힘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림 3] 다나 해러웨이. 2016. 『말썽거리와 함께 살아가기: 툴루세에 친족 만들기 』(출처: Duke University Press)

해러웨이는 유명한 「사이보그 선언」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었지만, 그가 말하는 ‘사이보그’는 기계 팔을 달고 있는 사람이나 일종의 로봇 같은 것이 아니다. ‘사이보그cyborg’는 영어의 cybernetic organism의 줄임말로서, 인간과 기계의 혼종이다. 사이보그는 과학소설이나 SF 영화에 등장하는 동시에 현실 속에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해러웨이는 최근에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인공지능이나 인간강화라는 제한된 의미의 ‘포스트휴먼’ 또는 ‘트랜스휴먼’이란 말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해러웨이는 더불어 존재하는 혼종으로서의 사이보그가 다름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인간의 모습임을 강조하기 때문에 반려종을 비롯하여 다른 종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깊이 있게 성찰한다.

해러웨이는 자신이 포스트휴머니스트posthumanist가 아니라 퇴비주의자compost-ist라 한다. human이 아니라 humus(퇴비, 두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인문학humanities보다 더 중요한 것이 퇴비학humusities라는 농담 비슷한 이야기도 망설이지 않는다.

퇴비 내지 두엄은 오랜 시간 동안 다져진 흙 속에 여러 미생물과 작은 동물과 식물이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미시생태계를 이루고 있고, 그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게 하는 원동력이다. 퇴비는 군림하지 않으며 주인 행세를 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모든 것을 뒷받침한다. 죽어가는 것과 배설된 것 속에서 살아 있는 것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두엄이다. 퇴비 내지 두엄이 갖는 그 놀라운 힘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질학적 시대를 가장 잘 표현해 준다는 게 해러웨이의 주장인 셈이다. 

툴루세의 특징을 보여주는 또 다른 핵심 개념은 ‘함께 만들기sympoiesis, making-with’이다. 칠레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와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J. Varela)는 자체생성autopoiesis이란 개념이 살아 있는 계, 즉 생명을 이해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이는 세포 안에서 필요한 세포내소기관과 세포막과 생명 유지에 필요한 여러 요소가 자체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에 주목한 개념이다. 자체생성의 문자적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내기’라는 뜻이다.

해러웨이는 자체생성이란 개념의 한계에 주목한다. 이 세상에 독불장군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생물학자로서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세포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체충족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이는 점에 주목했지만, 실상 세포 하나가 홀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

끊임없이 주변에서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물질들이 오고 가야 한다. 이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다른 존재와 나누고 교섭하고 상호작용하면서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툴루세를 이해하기에는 자체생성보다 오히려 ‘함께 만들기’란 개념이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림 4] “내부공생: 린 마굴리스에 경의를 표하며.” by Shoshanah Dubliner. 2012. (출처: CargoCollective)

이는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주목하는 세포내공생endosymbiosis의 개념과 깊이 연관된다. 더 넓게 보면 생태계 안에서 공생symbiosis하는 존재들 즉 공생자symbiont가 핵심이다. 결국 ‘스스로 만들어내기’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기’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지구 위의 삶의 모습을 제대로 묘사해 줄 것이다.

지질학자들이 유독 현재의 지구에서 ‘인간’이란 존재를 강조하여 감히 ‘인류세’란 표현을 쓴다면, 그리고 사회경제적 요소를 강조하는 ‘자본세’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면, 이 모두가 인간이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된다는 오만 때문일 수 있다. 틀림없이 인간은 지구상의 그 어떤 종보다도 막대한 힘을 만들어냈고, 이 복잡하고 미묘한 지구시스템을 쉽사리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여전히 인간보다 중요한 것이 이 거대한 지구를 지탱하고 있는 땅속의 그 미지의 것들 덕분에 살아갈 수 있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흙과 물과 공기 속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만들어 가야만 비로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툴루세’의 참된 모습이다.

인공지능이니 자율 주행이니 사물 인터넷이니 블록체인이니 하면서 새로운 과학기술이 모든 것을 바꿔버릴 것처럼 온갖 담론들이 횡행하고 있지만, 정작 지진과 태풍과 해일과 가뭄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하늘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인류의 현실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1968년 영화 <2001 우주 오딧세이>에서 우주인을 위협하던 인공지능 컴퓨터 HAL 9000의 전원을 꺼 버리기 위해서는 스크류드라이버 하나로 충분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독일의 과학기술박물관이 기획한 인류세 특별전은 현대 과학기술이 지니는 근본적 한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함을 잘 보여준다.

[영상 1]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예고편. 스탠리 큐브릭. 1968년작.

결국 우리는 함께 어우러져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하필 ‘툴루세’라는 낯선 용어를 굳이 도입해야 할까 하는 의문을 살짝 접어 둔다면, 적어도 ‘인류세’와 ‘자본세’가 우리가 살아가는 지질학적 시대를 지칭하기에 적합하지 않기에 대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땅속 심원에서 살아가는 낯선 크툴루이든, 익숙한 지렁이와 퇴비 속의 미생물이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은 “함께 살아가기”일 것이며, 그 이름에 인간의 흔적을 꼭 남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과학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살펴보면 대체로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믿음에서 점점 더 벗어나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간과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각자의 중심이면서 실상 특권적인 대접을 받는 중심은 어디에도 없다는 점을 과학의 역사는 역설하고 있다.

‘인류세’라는 개념은 분명히 기후변화와 지질학적 대격변과 지구생태계의 암울한 미래에 경종을 울리는 뛰어난 지적이다. 그렇긴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 주위를 돌아보고 발밑을 살펴본다면 우리가 해러웨이의 ‘툴루세’ 속에서 퇴비 속의 온갖 벌레들과 지렁이와 낯선 것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함께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굳게 지켜가야 할 가치임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http://www.stratigraphy.org/index.php/ics-chart-timescale
  • https://savageminds.org/2016/11/18/staying-with-the-trouble-making-kin-in-the-chthulucene-review/
  • Christophe Bonneuil, Jean-baptiste Fressoz (2013) L’Événement Anthropocène. La Terre, l’histoire et nous. Points.
  • Heather Davis and Etienne Turpin, eds. (2015) Art in the Anthropocene: Encounters Among Aesthetics, Politics, Environments and Epistemologies. Open Humanities Press.
  • Donna Haraway (2016)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Duke University Press.
  • Bruno Latour (2015) Face à Gaïa. Huit conférences sur le nouveau régime climatique. Éditions La Découverte.
  • Jason W. Moore, ed. (2016) Anthropocene or Capitalocene? Nature, History, and the Crisis of Capitalism. PM Press.
  • Bernard Stiegler (2018) The Neganthropocene. Open Humanities Press.

*‘나가’: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사(半人半蛇)의 뱀 종족; ‘가이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의 여신; ‘탄가로아’: 마오리 부족 신화에 등장하는 바다의 신. 랑기(하늘)와 파파(땅)의 아들로, 수많은 바다생물의 아버지가 되었다; ‘테라’: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의 여신; ‘하니야스-히메’: 일본 신화 속 지구의 수호 신; ‘파차마마’: 잉카 토템 신화 속 제물을 바치고 섬기던 여신; ‘오야’: 아프리아 요루바족의 여신. 바람, 번개, 폭우, 죽음과 부활을 관장한다; ‘고르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포르퀴스와 케토가 낳은 세 명의 자매인 스텐노, 에우뤼알레, 메두사를 의미한다; ‘아아쿨루주시’: 이누이트신화 속 최초의 창조자 어머니.
**이 글은 아트인포스트 zer01ne 디지털 매거진에 실렸던글(김재영)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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