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수학의 불확실성 – (4)포르투나와 사피엔티아, 또는 확률적 사유


과학과 수학의 불확실성

(1) 확실한 지식? 2020. 3. 3. 
(2) 기하학적 사유의 확실성 – 1. 2020. 3. 3.
(3) 기하학적 사유의 확실성 – 2. 2020. 3. 10.
(4) 포르투나와 사피엔티아, 또는 확률적 사유. 2020. 3. 17.
(5) 19세기의 과학과 수학. 2020. 3. 24.
(6)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2020. 3. 31.
(7)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양자역학의 서울 해석. 2020. 4. 7.
(8) 수학기초론과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2020. 4. 14. 
(9) 인식론의 문제. 2020. 4. 21.
(10) 과학과 수학은 확실한 지식을 주는가? 2020. 4. 21.

글: 김재영 (녹색아카데미)



기하학을 모범으로 삼아 전개된 명석하고 판명한 지식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흥미롭게도 도박의 문제였다. 피에르 드 페르마와 블레제 파스칼이 1654년에 주고받은 편지는 도박의 승률에 관한 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삶을 지배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행운이다.”(Vitam regit fortuna, non sapientia)라는 키케로의 말마따나 인류 역사에서 ‘포르투나’(행운)와 ‘사피엔티아’(지혜)는 언제나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어떤 심각한 결정을 해야 하지만 도무지 어느 것을 선택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은 무엇일까?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무작위 선택의 수단은 제비뽑기였다. 다양한 형태의 제비뽑기는 신적인 섭리의 확인을 위한 중요한 의식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제비뽑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거나 희생자를 고르는 사례가 자주 나타나며, 기독교 성서에서도 그런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림 1] 포르투나와 사피엔티아. 눈을 가리고 있는 왼쪽이 포르투나(행운)이고 오른쪽이 사피엔티아(지혜)이다. (Source: Petrarch, Remède de l’un et l’autre fortune prospère et adverse (Paris, 1524). 출처: Towards Data Science)

제비뽑기는 똑같은 모양의 막대나 표식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각 사람에게 그 중 하나를 고르게 한 뒤, 그 중 미리 표식을 해 놓은 제비를 뽑는 사람을 대표나 희생자로 삼는 방식이다. 이를 한자어로 하면 ‘추첨’(抽籤)이 되는데, 첨(籤)이라는 글자가 흥미롭다. 먼저 아래쪽 부분을 보면 오른쪽은 창(戈)이고 왼쪽은 사람(人)이 둘 있는데, 그 아래 아니다(非)라는 글자가 있고, 전체적으로 대나무를 의미하는 竹이 그 위에 있다.

창과 사람들로 이루어진 㦰(첨)이 “찌르다, 끊다”라는 뜻임을 염두에 두면, 이 글자는 “사람들 중에 누구를 찌르지 않을지 결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나무 조각”을 의미한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일본어에서는 籤의 독음인 쿠지(くじ)를 䦰라는 글자로도 쓰는 것으로 보아 대나무 조각 대신 거북껍질을 쓰기도 했을 것이다. 이 글자는 영어의 tally와 같다고 주석되어 있는데, 이것은 돈 같은 것을 빌리거나 빌려줄 때 관계자가 막대기에 눈금을 새겨 금액을 나타내고 세로로 쪼개서 뒷날의 증거로 삼은 것을 가리킨다.

복권이나 제비뽑기는 영어로 lottery인데, 프랑스어 loterie에서 온 말이다. 이는 네덜란드어 loterije에서 온 것으로 추측되는데, 중세 네덜란드어 lot가 그 기원이다. 최초의 복권은 1400년대 네덜란드가 효시라고 하며, 1530년대에 이탈리아 피렌체 지역에서 로또(lotto)라는 복권이 공식적으로 처음 나왔다. 이 말 자체는 제비뽑기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이다. 로또는 11부터 99까지의 숫자 다섯 개를 미리 선택하여 제출하게 한 뒤, 공정한 투표나 제비뽑기를 통해 다섯 개의 숫자를 얻어서 그 다섯 개의 숫자가 모두 일치하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는 제도이다. 

[그림 2] 이탈리아 산 마르코 광장에서의 로또 추첨. Gabriel Bella(1730-1799) (출처: gettyimages)

제비를 뽑을 때 어떤 제비가 나올지 분명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은 제비뽑기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주사위를 던졌을 때 어떤 숫자가 나올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주사위를 던져 어떤 결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공정한 처사가 될 것이다. 이것을 흔히 ‘랜덤’(random)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은 특정한 목적이나 패턴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말로 하면 ‘무작위’(無作爲) 내지 ‘제멋대로’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로또의 제비뽑기가 ‘랜덤’하지 않다면 그 로또는 심각한 불공정 시비에 휘말리고 수많은 소송에 연루될 것이다. 로또의 생명은 그 결과물(다섯 개의 숫자)이 불확실하다는 데 있다. 그 결과물들은 모두가 동등하게 가능해야(probable) 한다. 즉 그 개연성이 똑같아야 한다. 주사위놀이와 같은 확률성 놀이가 성립하기 위해서도 결과물의 개연성이 똑같아야 한다.  

확률(probability)의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비뽑기이든 추첨이든 로또이든 주사위놀이이든 모두가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름은 ‘확실함의 비율’(確率)이지만 사실 그 진짜 의미는 ‘불확실함의 비율’인 것처럼 보인다. 

[그림 3] 라플라스. Pierre-Simon Laplace. (1749-1827) (출처: wikipedia)

확률과 관련된 관념은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본격적으로 확률 개념이 논의되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계산법 등이 논의된 것은 17세기 말에 이르러서이다. 앞에서 인용한 라플라스의 글 역시 1814년에 출판된 『확률에 관한 철학적 고찰』에 포함된 내용이다. 

라플라스(P.S. Marquis de Laplace)는 『확률의 해석적 이론』(1820)과 『확률에 관한 철학적 고찰』(1814) 등을 통해 확률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를 확립했다. 라플라스는 어떤 사건의 확률은 “똑같이 가능한 경우들의 수에 대한 특정 경우의 수의 비”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는 지금도 많은 경우에 확률적 접근의 훌륭한 출발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얼핏 보면 별로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 정의에는 “똑같이 가능한 경우”라는 모호한 용어가 포함되어 있다.

라플라스는 “똑같이 가능한”이란 말의 의미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이른바 ‘무차별의 원리’(principle of indifference)를 도입했다. 즉 먼저 가능한 모든 기본적인 경우들을 망라하고 이 기본적인 경우들 사이에 특별히 어느 한 편을 더 선호하거나 특별하게 대접할 이유가 없다면, 이 기본적인 경우들이 모두 “똑같이 가능한” 내지 “똑같이 개연적인”(equally probable) 경우들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문제는 무차별의 원리를 적용하기 위한 ‘차별’의 기준이 둘 이상 있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림 4] 각 면이 나올 확률이 모두 같은 주사위 2개가 있다고 할 때, 이 두 개의 주사위로 나오는 경우의 수. (출처: wikipedia)

왜 우리가 관심을 갖는 대상에 대해 정확하고 분명한 지식을 가질 수 없고 확률적이고 개연적인 지식에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포르투나는 언제나 사피엔티아보다 더 많이 삶을 지배하는 것일까? 확률적인 지식은 우리가 대상을 덜 알고 있다는 뜻일 뿐이며, 언젠가는 대상을 더 많이 알아가면서 확률적 지식이 확실한 지식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닐까? 확률이라는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이안 해킹에 따르면, 확률 개념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무렵부터 이미 두 가지 서로 구분되는 개념이 ‘확률’이라는 같은 이름 아래 논의되었다. 하나는 인식론적인 확률로서 이것은 대상에 대해 주체가 가진 정보의 부족함을 전제로 한다. 다른 하나는 대상적/통계적인 확률로서 이는 곧 인식주체가 대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그 본연의 성질이 확률적인 것을 가리키는데, 이 때문에 통계적인 면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콩도르세는 앞의 것을 motif de croire라 하고 뒤의 것을 facilité라 불렀으며, 프와송과 쿠르노는 앞의 것을 probabilité로, 뒤의 것을 chance로 불렀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구분되는 개념의 확률에 대해 20세기의 논리실증주의자 루돌프 카르납은  ‘확률1’과 ‘확률2’라는 다른 용어를 붙일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용어에 대한 영어 번역어는 probability로 통일되었으며, 그 문자적인 의미는 얼마나 “있을법한가”의 정도를 가리킨다.

해킹은 이 말의 의미가 “잠정적인 판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독일어 번역어 Wahrscheinlichkeit는 얼마나 참인 듯이 보이는지의 정도를 가리킨다. 확률(確率)이라는 우리 말 번역어는 확실함의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인식론적인 확률에 다소 편향된 용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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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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