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수학의 불확실성- (1)확실한 지식? (2)기하학적 사유의 확실성-1


과학과 수학의 불확실성”

(1) 확실한 지식? 2020. 3. 3. 
(2) 기하학적 사유의 확실성 – 1. 2020. 3. 3.
(3) 기하학적 사유의 확실성 – 2. 2020. 3. 10.
(4) 포르투나와 사피엔티아, 또는 확률적 사유. 2020. 3. 17.
(5) 19세기의 과학과 수학. 2020. 3. 24.
(6)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2020. 3. 31.
(7)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양자역학의 서울 해석. 2020. 4. 7.
(8) 수학기초론과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2020. 4. 14. 
(9) 인식론의 문제. 2020. 4. 21.
(10) 과학과 수학은 확실한 지식을 주는가? 2020. 4. 21.

김재영 (녹색아카데미)



(1) 확실한 지식?

대낮에 해가 사라지면서 깜깜한 밤처럼 되는 개기일식은 아주 신기하고 특이한 현상이다.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일찍부터 일식 현상이 기록했으며, 18년 11일 8시간이라는 사로스 주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식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일식을 관측한 기록이 매우 많이 남아 있으며, 세종 때 관상감의 관리가 일식예측에서 십여 분의 오차를 보여 곤장을 맞은 기록은 유명하다. 현대천문학에서는 이 신기하고 특이한 현상이 언제 어디에서 일어날지 대단히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림 1] 개기일식이 일어날 때 태양, 달, 지구의 위치. 18년 11일 8시간(223 synodic months)마다 개기일식이 일어난다. (출처: wikipedia)


이와 달리 일기예보는 불과 한두 주 후의 날씨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최고의 컴퓨터 시스템을 갖춘 기상청이 왜 며칠이나 몇 주 뒤의 날씨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일까? 더 좋은 컴퓨터를 가져온다면 일기예보의 확실성의 더 늘어나게 될까? 다시 말해서 더 좋은 기술은 더 확실한 지식으로 이어질까? 개기일식에 대한 지식과 달리 일기예보에 대한 지식은 원래 불확실한 것일까? 

이 글에서 살펴보려 하는 주제는 과학 지식과 수학 지식의 (불)확실성이다. 확실(確實)하다는 말의 문자적 의미를 보면, 確은 ‘돌처럼 굳고 강하다.’라는 뜻이고 實은 ‘열매, 가득 참, 잘 익음’의 뜻이다. 따라서 확실한 지식이란 믿을 수 있고 분명하고 제대로 되어 있고 틀림없는 지식이다.

현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라도 여전히 과학의 방법 또는 수학의 방법은 확실한 지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생각을 역사적인 흐름이라는 씨줄과 개념적인 분석이라는 날줄의 그물망 속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해 보려는 것이 바로 이 글의 목적이다.

다음 절에서는 확실한 지식이란 관념이 17세기 유럽에서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 확실한 지식에 대한 추구가 어떻게 확률 개념으로 이어졌는지 살펴본다. 특히 19세기에 생물학과 물리학의 전문 분야가 형성되는 과정에 확률 개념 및 통계적 사고가 바탕이 되어 진화론과 통계 역학이 발달하게 된 맥락을 검토한다.

그 다음에는 20세기의 양자 역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하이젠베르크이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다음으로 수학 기초론의 문제를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중심으로 살펴본 뒤, 19세기의 물리철학자 뒤엠의 이론 미결정성 논제가 지니는 함의를 간단히 논의함으로써 글을 맺는다.

(2) 기하학적 사유의 확실성 – 1

데카르트(1596~1650)가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말한 것은 그가 ‘명석하고도 판명한’(clara et distincta) 지식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석하고 판명하게 인식된 것만을 따른다면 결코 틀릴 수 없다(『철학의 원리』 43절, 45절).

[영상 1] 데카르트는 어떻게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는가. (출처: BBC. 설정에서 ‘자동번역-한국어’를 선택하면 한국어 자막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명석한’ 인식은 “주목하는 정신 앞에 놓여서 드러나 있는 인식”이며, ‘판명한’ 인식은 “명석하면서도,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구별되어 있어서 이미 명석한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그 안에 포함하고 있지 않은 인식”을 말한다. 

데카르트의 말은 지식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전제로 한다. 데카르트 당시에는 피론주의와 같은 회의주의가 상당히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지식이 있는가, 더 의미 있는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튼튼한 기초로 삼을 수 있는 지식은 무엇인가, 교조적인 주장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피론이 제기한 문제였다.

피론주의에 따르면, 진리와 확실성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교조주의자들은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궤변론자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런 것도 아니고 저런 것도 아니다. 좋을 수도 없고 나쁠 수도 없으며, 선할 수도 없고 악할 수도 없으며, 하얗지도 않고 까맣지도 않다. 그러나 동시에 좋으면서 나쁠 수도 있고, 선하면서 악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ouden mallon).

[그림 2] 피론(Pyrrho. BC. 360 ~ BC. 270.) 1580년 작. (출처: wikimedia commons)


따라서 사물의 실재는 인간의 마음에 온전히 다다를 수 없으며, 확실함은 어떤 방법으로도 얻을 수 없으므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떠한 교조적 주장도 피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피론의 주된 관심은 원론적으로 윤리였지만, 피론주의는 자연스럽게 확실한 지식에 대한 회의주의적 입장이 된다. 피론주의는 자주 회의주의와 동의어처럼 사용된다.

17세기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피론주의의 문제는 가장 큰 화두였다.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주의자에 반대하는 반종교개혁의 근거 중 하나는 피론주의였다. 


(3) 기하학적 사유의 확실성 – 2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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