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유대인이 된 독일 최연소 정교수

“1937년 여름 나는 잠시 정치적 어려움에 빠졌다. 첫 시험대였다고 할까? 그러나 그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많은 친구들이 더 심한 일도 견뎌야 했으니 말이다.” 

이 구절은 양자역학의 창시자 중 하나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독특한 회고록인 <부분과 전체, 원자물리학과의 대화>에는 별로 상세한 설명 없이 나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그 해 여름, 하이젠베르크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이젠베르크는 1927년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정교수로 부임했다. 뮌헨의 루트비히-막스밀리안 대학(LMU)에 입학한 것이 1920년 가을이니까, 대학 입학 후 겨우 7년 만인 스물여섯 살에 독일 역사상 최연소로 정교수가 된 것이다.

1926년 초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게오르게 체칠 야페가 기센 대학으로 옮겨가면서 부교수 자리가 하나 생겼다. 그 해 10월 1일에 막스 플랑크가 은퇴하면서 베를린 대학에 정교수 자리가 생겼다. 그로부터 한 주 뒤 라이프치히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 테오도르 데쿠드레가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고, 얼마 되지 않아 그 근처 할레 대학의 이론물리학자 카를 슈미트도 은퇴했다. 세 달 뒤 1927년 1월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실험물리학 교수 오토 비너도 갑작스러운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물리학 연구가 활발하던 나라에서 갑자기 교수 자리가 쏟아진 것이다. 독일의 대학의 교수직은 원하는 사람이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적절한 후보를 찾아 교수 자리를 제안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926년 4월에 야페의 뒤를 이을 라이프치히 대학 이론물리학 부교수 자리의 후보로 오른 사람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 그레고어 벤첼의 순이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1926년 5월부터 코펜하겐의 이론물리학연구소로 가서 한스 크라머스의 후임으로 보어의 연구 조수 겸 코펜하겐 대학 강의를 맡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하이젠베르크는 4월에야 뒤늦게 보어에게 재정 지원에 대해 물어보는 편지를 보냈고, 보어는 매우 서둘러서 하이젠베르크의 급여를 올려주겠다는 전신을 보냈다. 당시 독일의 학계에는 젊은 학자가 대학에서 제안한 교수직을 응낙하지 않으면 한동안 다른 대학에서도 그 학자는 후보에서 제외되는 관례가 있었다.

아들이 교수가 되는 것을 소원으로 삼고 있던 하이젠베르크의 아버지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제안을 응낙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괴팅겐의 막스 보른과 리하르트 쿠랑에게 상의했다. 둘 다 보어와 함께 일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대답을 보내왔다. 그 무렵 하이젠베르크는 막스 폰 라우에의 초청으로 베를린 대학에서 콜로퀴엄을 하게 되었고, 베를린 대학에 포진해 있던 기라성 같은 물리학자들(아인슈타인, 네른스트, 라우에, 마이트너, 라덴부르크)은 모두 라이프치히 대학의 제안을 거절하고 코펜하겐으로 가라는 충고를 주었다.

파울리는 함부르크 대학에서 정교수 자리를 막 얻은 때여서 라이프치히 대학의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벤첼이 라이프치히 대학의 이론물리학 부교수로 부임했다. 1927년 6월 할레 대학의 인사위원회에서 카를 슈미트의 후임으로 하이젠베르크, 벤첼, 프리드리히 훈트를 추천했고, 조머펠트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데쿠드레의 후임으로 하이젠베르크를 거론하고 있다고 하이젠베르크에게 알려주었다.

그 무렵 막스 플랑크가 은퇴한 베를린 대학으로 조머펠트와 슈뢰딩거가 추천되었다. 조머펠트가 이 제안을 사양하자 바이에른 교육부는 바이에른을 떠나지 않은 조머펠트의 급여를 인상하는 동시에 오래전부터 조머펠트가 요청했던 이론물리학 부교수 자리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비록 부교수 자리였지만, 하이젠베르크는 뮌헨과 자신의 모교를 매우 사랑했고 조머펠트가 은퇴하면 그 후임이 될 것이 분명했다.

1927년 7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식적으로 교수직 제안이 왔다. 이제 하이젠베르크는 세 가지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할레 대학 정교수인가, 라이프치히 대학 정교수인가, 뮌헨 대학 부교수인가. 결국 하이젠베르크는 라이프치히 대학을 선택했다.

1933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의 하이젠베르크


하이젠베르크는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지만, 뮌헨에서 학교를 다녔다. 슈바빙에 있는 막스밀리안귐나지움을 다녔고, 결국 루트비히-막스밀리안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거기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하이젠베르크의 뮌헨과 뮌헨 대학에 대한 사랑은 남다른 것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33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고 많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지만, 라이프치히에서의 생활이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히틀러와 나치의 집권 후 반유대주의에 따라 많은 과학자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쫓겨나야 했던 상황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유대인의 물리학으로 낙인찍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나치주의자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37년 1월 엘리자베트 슈마허를 만나 그 해 4월 29일 22살의 엘리자베트 슈마허와 결혼했다. 저명한 경제사상가이자 통계학자인 에른스트 슈마허의 동생이다. 그 해 여름, 하이젠베르크에게 또 다른 기쁜 소식이 들렸다. 조머펠트가 은퇴하면서 그의 후임으로 다름 아니라 하이젠베르크가 지명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염원하던 모교 뮌헨 대학으로 갈 수 있게 되었고, 아기를 가진 엘리자베트와 함께 살 집까지 뮌헨에 마련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1937년 7월 엘리자베트와의 행복한 여행에서 돌아온 하이젠베르크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슈츠슈타펠(SS) 즉 나치 친위대의 기관지인 <흑군단, Das Schwarze Korps>에 하이젠베르크를 ‘백색 유대인’이라고 비난하는 글이 실렸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가 “1937년 여름 나는 잠시 정치적 어려움에 빠졌다.”라고 짧게 술회한 부분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백색 유대인’이란 독일인이면서도 유대인의 ‘사악한’ 정신을 퍼트리는 사람이었고, 하이젠베르크의 경우는 다름 아니라 유대인인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대학에서 가르치고 그 주제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이젠베르크가 뮌헨 대학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던 요하네스 슈타르크의 모략이었다. 친나치였던 슈타르크는 필립 레나르트와 더불어 유대의 물리학이 아닌 독일의 물리학을 세워야 한다면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대표적인 유대의 물리학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이젠베르크에게는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물어졌고, 그 뒤 1년 넘게 이를 되돌리려 동분서주해야 했다. 이대로 가다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심지어 강제수용소로 끌려갈 수도 있었다. <흑군단>에서는 하이젠베르크를 ‘물리학계의 오시예츠키’라고 비난했는데, 오시예츠키(Carl von Ossietzky 1889 -1938)는 반나치 평화운동을 주도하여 1935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1937년 당시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낙관적이며 독일을 사랑하던 하이젠베르크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관계자와 비밀리에 접촉하여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갈 통로를 찾았던 것을 보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미래를 위해서도 이론물리학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과학자는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고 유대인의 연구라도 독일인에게 유용할 수 있음을 역설하는 편지를 직접 슈츠슈타펠의 대장 하인리히 히믈러에게 보내려 했지만, 실질적인 통로가 없었다. 다행히 하이젠베르크의 외할아버지와 히믈러의 외할아버지가 김나지움 교장 친선모임의 회원으로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하이젠베르크의 어머니가 히믈러의 어머니와 친분이 있어서, 어머니들을 통해 하이젠베르크의 편지가 히믈러에게 전달되었다. 하이젠베르크가 베를린에 있는 슈츠슈타펠 본부의 지하신문실로 불려가 조사를 받을 때 운 좋게도 조사관 중 하나가 하이젠베르크가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했던 요하네스 유일프스였고, 다른 조사관들도 하이젠베르크의 인격과 명망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히믈러와 친분이 깊었던 저명한 독일의 항공공학자 루트비히 프란틀의 적극적인 변호와 중재로 1938년 7월 드디어 히믈러가 하이젠베르크의 결백을 승인하는 서류에 서명을 했다. 

하이젠베르크가 이 한 해 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도 비밀 국가경찰(게슈타포)가 나치 특유의 군화 소리를 내면서 계단을 올라와 침실로 들어오는 악몽을 꾸곤 했다고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뮌헨 대학으로 가려던 계획을 접어야 했고 또한 이후 어떤 식으로도 유대인 과학자를 거론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그로서는 나치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 과학자들을 못 본 척해야 했던 것이다.

2019년 7월 9일
김재영 (녹색아카데미)
*이 글은 2017년 한국물리학회에 실었던 것이며 이곳에 다시 소개한다.
원문 출처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8733562&memberNo=38442864&searchKeyword=김재영&searchRank=5

저자 소개
김재영 박사는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물리학기초론 전공으로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 초빙교수, 서울대 강의교수, 이화여대 HK 연구교수, KIAS Visiting Research Fellow 등을 거쳐 현재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물리철학 및 물리학사를 가르치고 있다. 공저로 『양자, 정보, 생명』, 『뉴턴과 아인슈타인』 등이 있고, 공역으로 『에너지, 힘, 물질』, 『과학한다는 것』, 『인간의 인간적 활용: 사이버네틱스와 사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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