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생명 – (6) 온생명과 인간의 관계 & 결론


“인공생명”

1. 글머리: 생명과 기계의 경계, 몸-마음 문제. 2020. 1. 21.
2. 인공생명과 생명의 철학. 2020. 1. 28.
3. 야콥 폰 윅스퀼의 둘레세계. 2020. 2. 4.
4. 인지과학의 기연적 접근. 2020. 2.11.
5. 생명을 물리학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2020. 2. 18.
6. 온생명과 인간의 관계 & 결론. 2020. 2. 25.

글: 김재영 (녹색아카데미)



온생명과 인간의 관계


온생명론은 “생명에 관한 본질적 혹은 근원적 이해”를 추구한다. 이것은 “생명이라 불릴 현상이 생명이 아니라고 불릴 현상에 비해 어떠한 특징적 성격을 가질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과학적 기준을 설정하고 이에 맞추어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해낼 현실적 판단을 수행할 단계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장회익 2001).

그런데 이러한 논의에서 인간에 대한 논의는 비교적 약한 편이다. 인간은 온생명의 ‘두뇌’로 비유되기도 하고, 온생명 안의 구조들 중 최상의 지적 기능을 지닌 존재임이 강조되기도 하며, 현대 문명에서 온생명에 대한 논의가 가지는 함축이 깊이 있게 논의되고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한 걸음 더 나아간 고찰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온생명론에서 인간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온생명론의 주된 관심이 “무엇이 생명이고 무엇이 생명이 아닌가, 그리고 더 나아가 생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 문제”에 있긴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생명의 일부로서의 인간은 무엇이며, 이러한 인간은 생명의 세계 안에서 어떠한 위상을 지니는 존재인가 하는 문제”(장회익 2014b: 273)에도 심오한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것은 특히 현대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비판에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온생명은 태양과 지구 사이의 자유에너지 흐름을 바탕으로 하여 유지되는 존재이다. 이는 시간 및 공간 위에서 연결된 고리들로 이루어지는 정합적 체계로서, 그 모든 부분들이 일정한 시간 동안 생존을 유지하는 의존적인 존재들이다. 그 중 인간은 온생명 자체에 대한 반성적 사유에 이를 수 있을 만큼 영특한 존재로 여겨진다. 또한 비록 개체생명의 보편적 생존 양상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지만, 생태계 안에서의 위상을 보면 다른 모든 생물종들을 바탕에 깔고 있는 최상위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두뇌와 중추신경계를 통해 명료한 내적 의식을 지니는 최초의 생물체가 되었으며, 이러한 내적 의식은 다시 삶의 주체적 영위자가 되어 자신을 중심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자신의 의도에 따라 사물을 조작해가는 새로운 존재양상”(장회익 2014b: 212)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이 집합적 지성에 의해 자신이 속한 전체 생명의 모습인 온생명을 파악하는 최초의 존재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장회익 2014b: 274-276).

그런데 온생명론에서 막상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의외로 그에 대한 개념은 정교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인가? 호모 하빌리스는 어떠한가? 진화론의 맥락에서 볼 때 호모 사피엔스와 연속적으로 매우 가까운 계보에 속하는 다른 영장류는 과연 온생명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을까? 가령 19세기 이전의 인류 역사를 보면 인간이 집합적 지성을 사용하여 생명 전체의 모습을 보고 있지 못한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19세기 이전의 인간은 지금의 인간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림 1] 인류. 사람 종, 사람 속, 사람 과, 영장 목, 포유 강, 척삭동물 문, 동물계. (출처: wikipedia나무위키)

이와 같은 질문은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미묘한 문제에 부딪힌다.

“만일 온생명 안에서 온생명을 ‘나’로 의식하는 그 어떤 집합적 지성이 형성된다면, 이는 곧 온생명 자신이 스스로를 의식하는 의식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신경세포들의 집합적 작용에 의해 인간의 의식이 마련되듯이 인간의 집합적 활동에 의해 온생명의 의식이 마련되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온생명의 신경세포적 기능을 지닌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장회익 2014b: 276-7)


현대 신경생물학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신경세포의 체계가 적절하게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초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와 달리 신경세포들의 적절한 체계를 준비한다고 해서 이로부터 의식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신경세포들로부터 의식이 생겨나는 현상은 하부체계들이 모여서 하부체계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창발적 속성(emergent property)을 갖게 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창발적 속성이 나타나는 것을 굳이 인간에 국한시킬 이유가 없다. 실제로 예쁜꼬마선충(C. elegans)과 같은 ‘하등한’ 동물에서도 명백하게 신경세포들의 집합적 작용을 통해 일종의 의식으로 간주할 수 있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현대의 심리철학 및 인지과학에서 풍부하게 논의되어 온 것처럼, 신경세포들의 집합과 의식 사이의 연관을 밝히는 것은 원론적으로 불가능한 철학적 사유의 문제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인간을 온생명의 신경세포로 ‘유비’하는 것만으로는 온생명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상과 지위를 알 수 없다. 

무엇보다도 앞에서 제시한 프로스테시스의 문제에서 이 점이 더 두드러진다. 인간이 사용하는 다양한 도구는 인간의 인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런 점에서 단순히 인간을 피부 뒤에 감추어 있는 어떤 것과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가령 영화 「더 게임」의 내용처럼 뇌 전체를 바꾼다면 그 때의 정체성 개념은 뇌로 갈 것인가, 아니면 뇌 이외의 몸으로 갈 것인가? 

[영상 1] 영화 <더 게임> (2007년 제작) 예고편. 


온생명론이 생명 일반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고 이미 알려져 있는 인간의 개념을 사용하여 낱생명과 온생명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고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지금 우리의 논의는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거꾸로 온생명론에서 찾으려는 시도이다. 또한 그런 시도를 통해 프로스테시스의 문제를 토대로 한 인간론에서 지평을 확장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용어가 ‘온우리’이다 (장회익 2009). 이는 온생명의 인식적 측면을 강조하는 개념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는 ‘나’의 개념을 확장하여 ‘더 큰 나’에 대비되는 ‘가장 큰 나’를 지칭하는 것이며, ‘함께 사는 사람들로서의 우리’를 넘어선 ‘온생명으로서의 우리’에 해당한다. ‘온생명’이 일종의 존재론적 개념이라면, ‘온우리’는 일종의 인식론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림 2] ‘온생명’이 일종의 존재론적 개념이라면, ‘온우리’는 일종의 인식론적 개념이다. (그림: 장회익)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프로스테시스 또는 포스트휴먼의 문제를 되짚어볼 단초를 볼 수 있다. 즉 존재론적 측면에 국한된 관점이 아니라 인식론적 측면을 아울러 살펴봄으로써 사이버네틱스와 인공생명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인공생명의 접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가능한 생명’을 찾는 진지한 노력이었으나 존재론적으로 생명과 비-생명(또는 물질)의 차이를 구별해 내지는 못했다. 인공생명의 접근과 달리 온생명론은 생명과 비-생명의 존재론적 관계를 해명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만일 ‘온생명’이 ‘온우리’로 발전되지 않는다면,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 즉 관찰자의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한 사이버네틱스가 제대로 설 수 없다는 스스로의 비판이 온생명론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베이트슨과 폰푀르스터와 마투라나가 주목한 것이 바로 이 관찰자의 문제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존재론적 개념으로서의 ‘온생명’을 인식론적 개념으로서의 ‘온우리’로 발전시켜 프로스테시스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을까?

[그림 3] 폰푀르스터. 1974. <Cybernetics of Cybernitics> 중에서. (출처: ILLinois Univ. Library. wikipedia)

이 대목에서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이 지니는 새로운 함축이 중요해진다.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은 무엇보다도 양자역학이라는 특수한 물리학 이론의 한 가지 해석이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양자역학이라는 특별한 이론에 대한 대안적 해석을 제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다.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은 동역학 일반에서 드러나는 고유한 인식적 구조에 주목하고, 그러한 구조적 고찰을 토대로 다른 모든 동역학을 포괄할 수 있는 일반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양자역학이 고전적인 물리학이론들과 차별성을 보이는 것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파동함수를 말하고, 어떤 사람은 불확정성 원리를, 어떤 사람은 연산자를, 어떤 사람은 힐버트 공간을, 어떤 사람은 확률적 기술을 말할 것이다.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에서는 상태서술과 사건서술이 일대일 대응되지 않는다는 점을 가장 핵심적인 차이로 본다. 일반적으로 동역학의 인식 구조에서 상태서술과 사건서술을 구분하고 나면, 측정의 문제가 쉽사리 해결된다.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은 소위 측정의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측정장치를 ‘주체라고 하는 영역’에 포함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물리학적 의미의 ‘측정’은 단순히 측정장치와 물리적 대상 사이의 ‘상호작용’(interaction)이 아니라, 측정주체가 외부 대상으로부터 정보를 획득하는 ‘교촉’(交觸, transaction)이다.

다시 말해 ‘측정’은 측정주체 바깥에 있는 두 존재자, 즉 대상과 측정장치 사이의 관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측정주체 바깥에서 안쪽으로 정보가 전해지는 인식론적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주장이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우선 세계를 서술 대상과 이와 정보적 접촉을 지닌 여타의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이 때 인식의 주체는 이 여타의 부분에 속하게 된다. 즉 세계의 한 부분(주체)이 세계의 다른 한 부분(대상)에 대한 동역학적 서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수적인 것은 이 대상의 존재만이 아니라 이와 정보적 접촉을 지닐 수 있는 주체의 물리적 존재성이다.

제삼자의 관점에서 이들 사이의 정보적 접촉을 본다면 이는 오직 물리적 상호작용일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주체로서는 대상과의 상호작용이 가능한 물리적 실체를 자기 쪽에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곧 주체의 영역에 속하는 감각기구 혹은 관측장치들이다. 여기에 감지된 내용들이 바로 정보이며, 이러한 정보들은 주체 내부에서 동역학적 방식이 아닌 정보적 방식으로 전달되고 처리된다.”

(장회익 2009: 25-26)


이제 관점을 뒤집어 보자. 원래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은 양자역학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 제안된 것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양자역학의 새로운 해석으로부터 인간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 양자역학이 인간 개념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측정’을 둘러싼 인식주체의 문제이다.

주체는 누구인가, 또는 무엇인가? 온생명론에서 주체는 정보의 흐름에 따라 정의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관측장치 또는 감각기구는 주체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물리학적 의미에서 관측은 추상적으로 대상에 대한 사건서술을 얻는 것에 해당하지만, 이것을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외부 대상으로부터 정보를 획득하는 ‘교촉’이다. 

시각장애인이 길을 걸어가기 위해 필요한 (길에 대한) 정보를 얻게 하는 장치인 지팡이는 틀림없이 훌륭한 측정장치이다. 만일 측정장치를 ‘주체라고 하는 영역’에 포함시켜야 한다면, 시각장애인의 지팡이를 그 사람의 일부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 시각장애인의 지팡이는 그 용도를 고려할 때 틀림없이 주체의 일부이다. 

생명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찾아내고 이를 통해 물질과 생명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 주안점을 둔 온생명론은 인간 또는 의식이라는 층위에서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서두에 언급했다. 이제 자체생성성 이론과 기연적 접근과 둘레세계 이론이 어떻게 온생명론의 난점을 해결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는 보생명의 개념을 꼼꼼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보생명(co-life)은 특정의 개체생명에 대해 “온생명에서 그 개체생명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으로 정의된다(장회익  2009; 2014a; 2014b).

[그림 4] 낱생명, 보생명, 온생명의 관계. (그림: 장회익)


여기에서 개체생명은 유전자나 세포나 기관이나 종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하나의 연속체를 이룬다고 여겨지는 개체 또는 유기체들의 생명이다. 개체(個體 individuum)는 어원 그대로 더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단위로서의 존재를 가리킨다. 개체는 피부 또는 껍질로 둘러싸인 공간적 부분으로서 에너지 교환과 호흡(즉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교환)의 경계가 된다는 점에서 유기체(有機體 organism)이기도 하다.

온생명 및 보생명의 개념은 열역학적 고찰을 근거로 삼지만, 자유에너지만이 아니라 구성입자들의 교환까지 포함될 수 있다는 점에서 통계역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일반체계이론의 논의와 직접 연결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생명은 단순히 온생명을 기준으로 한 개체생명의 여집합이 아니다.

만일 개체생명을 개체나 유기체와 동등한 것으로 보면, 보생명은 사실상 개체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 환경 또는 다른 개체나 다른 종들의 군집과 같은 것이 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요소들을 모두 고려할 수 없으므로 가장 가까이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만을 그 개체에 대한 보생명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 점에서 보생명의 규정은 개체-특정적인 동시에 근사적이다. 그러나 그 경우 보생명은 기존의 환경 개념이나 니치 개념과 실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어떤 면에서는 같은 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개체생명을 개체나 유기체가 지닌다고 흔히 여겨지는 생명이라고 보면, 보생명의 개념은 단순히 환경을 다르게 부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온생명(즉 진정한 의미의 생명)에 대한 정의를 다시 보면, 생명은 곧 유기적 체계의 연계적 국소질서에 해당한다.

임의의 계가 연계적 국소질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국소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외부적 요소가 반드시 작용해야 한다. 그 외부적 요소는 비단 생존을 위한 환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체의 피부를 경계로 출입하는 에너지와 공기까지 포함된다. 따라서 보생명은 단순히 환경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생명의 정의가 개체-특정적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환경은 특정한 개체에 대한 환경이라기보다는 개체들이 퍼져서 서식하는 공간으로서 개체들과 직접 연관을 맺지 않은 채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개체생명을 “개체들의 살아 있음”으로 이해하면, 보생명은 철저하게 어느 개체생명의 보생명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가령 심해어에게 뭍에 있는 관목은 그 살아 있음에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관목은 심해어의 보생명이 아니다. 곤충을 먹이로 삼는 개구리에게 날아가는 곤충 뒤의 배경이 되는 수풀은 직접적으로는 보생명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보생명은 각 개체마다 다르게 주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개체생명을 생명체로 볼 때 보생명은 그 생명체의 존속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다른 생명체나 무생물을 포함하는 보생명‘들’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보생명을 일반적인 의미의 ‘환경’과 같은 것으로 보는 관점은 환경을 애초에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각 개체의 생명 또는 개체생명을 고려하지 않고 환경을 그 자체로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도한 상정이다.

실질적으로 보생명은 윅스퀼의 둘레세계와 직접 이어지는 개념이다. 둘레세계는 개별적인 유기체들 또는 종들이 각각 고유하게 인지하거나 감각하는 세계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오컴의 면도날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뉴턴의 실체적 공간 개념보다 라이프니츠의 관계적 공간 개념이 더 우월한 것처럼, 생명체들과 무관하게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는 환경 개념이 아니라 각 개체생명들에 특정적인 보생명으로서의 둘레세계의 개념이 더 우월한 개념이 된다.

그런데 인식 또는 의식을 바렐라-톰슨-로슈의 기연적 관점으로 이해하면, 인식 또는 의식은 각 개체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과 만나는 것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것은 인식 또는 의식이 피부와 두개골 안에 갇혀 있는 어떤 신비한 물질적 조합이 외부에 대해 선형적인 인과에 의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둘레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감각-운동을 통해 직접 만들어나가는 순환적 인과라는 의미이다. 생명이 피부 내지 껍질로 외부와 구획된 가시적 존재로 한정되지 않는 것처럼 인식 또는 의식도 개체생명의 신체 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보생명이라는 개념은 둘레세계의 개념이 정확히 생명에 대한 정의 속에 포함될 뿐 아니라 개체생명과 보생명의 상호작용을 통한 의식의 형성을 잘 드러내준다. 그런 점에서 보생명의 개념은 둘레세계 이론과 기연적 접근을 연결해 주는 핵심적인 고리이다.

결 론


이제까지 우리는 몸과 기계의 경계(인터페이스)를 사이버네틱스와 인공생명과 온생명의 맥락에서 논의했다. 이를 위해 프로스테시스의 문제를 소개하고 이에 대한 논의로서 베이트슨의 사이버네틱스와 마투라나의 자체생성성이 갖는 함의를 다루었다. 이에 따르면, 동물과 기계를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표방된 사이버네틱스가 제대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찰자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생명과 기계의 경계를 허무는 것처럼 보이는 인공생명의 접근을 검토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생명철학 내지 생물학의 철학과 통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몸과 기계의 경계를 논구하는 우리의 접근에서는 제대로 된 존재론적 주장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인공생명의 접근은 몸과 기계의 경계가 고정적이지 않고 오히려 유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관찰자의 문제가 불거져 나온 사이버네틱스와 존재론적 함축이 약한 인공생명의 접근을 종합하는 것이 바로 온생명론이다. 온생명론은 원래 생명이라는 것이 비-생명과 어떻게 다른지 논의함으로써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답하는 이론이다.

그러나 프로스테시스의 문제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더 큰 맥락의 문제로 가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이 프로스테시스의 문제에 어떤 함의를 갖는지 주목하고, 결국 관찰자의 문제를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을 통해 해결함으로써 프로스테시스의 문제에서도 도구를 몸의 일부로 수용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올바른 입장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러한 결론은 이 글의 성격상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몸과 기계 사이의 경계를 다루는 것 자체가 거대한 논제이고, 인공생명론에서의 참신한 접근방법과 문제의식을 토대로 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더 심도 있는 토론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온생명론의 성과와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을 연결시키고, 특히 최근에 제안된 ‘온우리’의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은 이 글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며, 이는 향후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 글에서 주목한 몸과 기계의 인터페이스는 커뮤니케이션, 즉 교통이다. 결국 커뮤니케이션에서의 핵심을 외부로부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내부의 지성적•감성적 활동이 외화되는 과정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제 우리는 명실 공히 시각장애인의 지팡이는 그의 일부이며, 나의 존재는 나의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막힘없이 펼쳐져 가는 확장된 ‘나’로 다시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확장된 ‘나’를 기계로 환치된 대상적 존재자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몸과 기계 사이의 경계선(인터페이스)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교촉과 상호작용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맥락에서 그 경계가 유동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 쪽이 다른 쪽을 제거해 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 5] “생 드니 주교”. ‘철학적 좀비’(philosophical zombie)로 자주 언급된다. 로마시대 258년 당시 순교한 생 드니 주교는 잘린 자신의 목을 들고 2마일을 걸어갔다는 전설이 있다. 이 그림은 윌리엄 혼(William Hone)이 출판한 책 The Every-day Book(1825-1826)에 실려있다.(출처: RationalWiki)


현대 신경과학의 엄청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의식에 대한 이해는 그다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철학적 좀비는 우리와 기능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하지만 현상적(지각적) 의식은 없는 존재로 정의된다.

좀비 논변 자체는 의식에 대한 환원주의적 물리주의가 지니는 한계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만, 확장된 좀비 논변들을 통해 오히려 이원론을 공격할 수 있음을 보았다. 철학적 사유로서의 좀비 논변은 의식에 대해 실질적으로 아무런 새로운 말을 해 주지 못하는 셈이 되었다.

이제 공은 다시 경험적 실증적 과학으로서의 신경과학에 넘어온 것처럼 보이며, 철학은 신경과학의 시녀로 전락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전통적인 데카르트 식의 몸-마음 문제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피상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현상학적 사유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문제의 틀을 몸-신체-마음으로 확장한다면, 의식에 관해 훨씬 더 풍부한 철학적 논의가 가능해진다. 마음과 몸과 신체의 삼각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물리주의의 맥락과는 다른 차원에서 좀비와 같은 존재가 있을 수 없으며, 오히려 현상적 의식이야말로 생물학적·생리학적 토대 위에 있음이 분명해진다.

데카르트의 몸-마음 문제를 넘어서는 현상학적 사유들로서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자체생성성 이론, 에반 톰슨 등의 인지과학에 대한 기연적 접근, 야콥 폰 윅스퀼의 둘레세계 개념, 장회익의 온생명론이 긴밀하게 만날 수 있는 계기와 연결고리를 모색했다.

아직은 이 마디점들이 다소 병렬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입체적인 구조가 분명하게 제시되지는 않았다. 이 마디점들이 어떻게 만나서 창발적으로 새로운 통찰과 혜안을 마련해 줄지 더 많은 것이 해명되어야 한다. 이러한 마디점들의 연결가능성을 논의함으로써 이후의 더 나아간 연구를 위해 중요한 디딤돌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생명” 시리즈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 김재영 (2017). “사이버네틱스에서 바라본 생명: 비인간전환의 관점”. 『정보혁명 – 정보혁명 시대, 문화와 생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다』. 한울아카데미.
  • 장회익 (2001). “유전자와 온생명: 미시적·개체중심적 생명 연구의 한계”, 「과학과 철학」, 제12집 53-76.
  • 장회익 (2009). 『물질, 생명, 인간: 그 통합적 이해의 가능성』, 돌베개.
  • 장회익 (2014a).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한울아카데미.
  • 장회익 (2014b). . 『삶과 온생명』, 현암사.

“인공생명” 시리즈는 김재영(2017)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과학칼럼은 매주 화요일에 업로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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