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블과 가모프에 가려진 우주론의 개척자들


1917년 2월 8일 프로이센 과학학술원의 학술대회에서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의 우주론적 고찰”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그 자신이 1년 전에 새로 제안한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우주의 탄생과 변화를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기술할 수 있다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실제로 우주의 탄생과 변화를 말해주는 풀이를 찾아내지 못했지만, 이후 프리드만(1922, 1924), 디지터(1932), 톨만(1934), 로버트슨(1929, 1935, 1936), 월커(1936) 등을 통해 우주론에 적용할 수 있는 시공간 풀이가 상세하게 밝혀졌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중력장 방정식의 수학적 풀이만으로는 상대론적 우주론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갖추어 갈 수 없었고, 관측이라는 훨씬 더 중요한 버팀목이 있어야 했다. 여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에드윈 허블(Edwin Hubble, 1889‒1953)이다. 우주에 떠 있는 가장 중요한 우주망원경의 이름을 비롯하여 그의 이름은 팽창우주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허블 상수, 허블 시간, 특히 무엇보다도 허블의 법칙은 우주론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허블의 법칙을 정말 허블이 발견한 것일까?


먼저 1920년 4월 26일에 미국 국립학술원의 주최로 스미소니언 자연박물관에서 열렸던 ‘대논쟁’이라는 제목의 학술회의로 옮겨 보자.
헤버 커티스(Heber Doust Curtis, 1872‒1942)와 할로우 섀플리(Harlow Shapley, 1885‒1972)가 이 대논쟁의 주인공들이다. 안드로메다자리에는 고대부터 알려진 밝은 별들 사이로 희끄무레한 구름 같은 천체가 있다. 18세기 천문학자 샤를 메시에는 이런 성운이나 성단(별무리)의 일목요연한 목록을 만들었고, 안드로메다자리의 ‘성운’은 메시에가 발견한 31번째의 특이한 천체라는 뜻으로 M31이라 부른다. M31에 대해 섀플리는 자신이 구상성단들을 이용하여 3차원 구조를 밝혀낸 우리 은하계 안에 있는 성운이라고 주장한 반면, 커티스는 ‘섬 우주’를 주장한 이마누엘 칸트를 인용하면서 M31도 우리 은하처럼 또 다른 은하임을 주장했다. 이 대논쟁을 판가름하기 위해서는 M31까지의 거리를 재는 것이 핵심이었다. 만일 M31까지의 거리가 우리 은하의 크기보다 더 멀다면 커티스의 ‘섬 우주’가 옳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섀플리의 승리가 된다. 

헨리에타 리빗(Henrietta Swan Leavitt, 1868-1921)

이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결정적인 증거는 헨리에타 리빗(Henrietta Swan Leavitt, 1868‒1921)의 광도-주기 관계에 있었다. 리빗은 하버드 대학 천문대에 소속된 관측 천문학자였다. 하버드 대학 천문대장 에드워드 피커링(Edward Charles Pickering, 1846‒1919)은 천문학이나 수학을 공부하고도 대학에서 직장을 얻지 못한 여성들을 ‘컴퓨터’ 즉 계산하는 사람이란 이름으로 고용하여 천문 관측을 하게 했다. 피커링의 속셈은 전문적인 능력과 끈기와 성실함을 갖춘 여성들을 싼 월급으로 고용하려는 것이었지만, 여성들이 기껏 대학에서 전문지식을 배우고도 학계에 진출할 수 없었던 19세기 미국의 상황을 고려하면 피커링이 과학의 역사에 의미 있는 기여를 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리빗은 케페우스 자리에서 발견된 변광성과 같은 유형의 변광성 즉 세페이드 변광성들에서 특이한 사실을 알아냈다. 이 변광성은 며칠을 주기로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 것이 관측되었는데, 이미 알려진 별의 절대밝기 즉 광도와 일정한 상관관계를 보인다. 별의 광도를 알아낼 수 있다면 겉보기 밝기와 비교하여 별까지의 거리를 구할 수 있다. 따라서 세페이드 변광성을 발견한다면 곧 그 별까지의 거리를 정할 수 있다.

에드워드 피커링과 하버드 대학 천문대의 계산원들(com- puters)(1913년)

1924년 에드윈 허블이 M31을 찍은 사진 건판에 쓴 “VAR!”라는 글자는 허블이 M31에서 세페이드 변광성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말해 준다. 이 세페이드 변광성을 이용하여 M31까지의 거리를 구하고 나니 당시 알려져 있던 은하계의 크기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대논쟁에서 섀플리가 틀리고 커티스가 옳다는 의미가 된다. 경쟁하는 두 이론(가설)이 있고, 결정적 실험 또는 결정적 관측을 통해 어느 것이 옳은지 판별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과학사 서술이다.  


그런데 커티스-섀플리 논쟁이 허블의 세페이드 변광성으로 쉽사리 해결되어 버렸다고 보는 것은 어딘가 의심스럽다. 1919년 에딩턴의 일식 관측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한 결정적 실험이라 말하지만, 실상은 일차대전 직후의 영국과 독일 사이의 미묘한 정치적 관계와 영국 내 천문학자 그룹의 주도권 문제와 같은 사회적 요소들이 더 중요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커티스-섀플리 논쟁도 비슷한 면이 있지 않을까? 


한 가지 실마리는 허블이 자신의 발견을 처음 발표한 곳이 학술지가 아니라 뉴욕 타임즈(1924년 11월 23일자)였다는 점이다. 왜 허블은 이런 식의 언론 플레이를 했을까? 학술지의 동료 평가를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런 언론 공개가 학술지 심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섀플리와 허블은 둘 다 미주리 출신이고 두 사람 다 조지 헤일이 높이 평가하여 윌슨산 천문대에 채용한 관측천문학자였다. 섀플리는 1921년에 하버드 대학으로 옮겨갔는데, 이 과정에서 1920년 4월에 열린 ‘대논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섀플리의 구두발표는 미리 제출한 원고와 달랐고, 전문적이고 상세한 논의 대신 기초적인 주제들에 집중했다. 애초에 M31이라는 ‘성운’이 우리 은하 안에 있는가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었지만, 섀플리의 발표가 테크니컬할 문제를 거의 건드리지 않는 바람에 소위 ‘대논쟁’은 이미 학술회의 장소에서 커티스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 버렸다. 섀플리의 강연에 깊은 인상을 받은 하버드 대학의 관련자들은 이듬해에 섀플리를 교수로 초빙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천문학자 헨리 노리스 러셀(Henry Norris Russell, 1877‒1957)을 지도교수로 학위를 마친 섀플리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허블은 만능 스포츠맨으로서 법학과 문학을 전공하고 시카고 대학 여키스 천문대에서 일하다가 일차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서둘러 박사학위를 마쳤으며, 전쟁이 끝난 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1년 남짓 천문학을 더 공부한 뒤에 헤일의 눈에 들어 윌슨산 천문대에 취직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더 주목받는 것을 견디지 못했으며 승부욕이 아주 강하고 오만했던 허블로서는 M31까지의 거리를 측정한 자신의 연구가 누군가의 평가를 받는 것도 불쾌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여하간 허블은 이 연구를 통해 천문학계에서 갑자기 유명인사가 되었다. 허블은 그다음으로 더 많은 은하들을 찾아냈고, 이 은하들이 모두 우리 은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1929년에 미국 <국립학술원 회보>에 출판된 허블의 논문 “외부은하 성운의 거리와 사선 방향 속도의 관계”의 결론 부분은 자신이 찾아낸 46개의 외부 은하의 사선 방향 속도의 정확한 측정값을 이용하여 ‘디지터 효과’, 즉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일수록 멀어져 가는 속도가 거리에 비례하여 커진다는 효과를 확인하려 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디지터의 논문은 1917년의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동적인 우주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디지터 효과’라는 이름은 다른 현상을 가리키기 때문에 적합한 이름은 아니다.


그런데 허블이 이러한 내용을 발표하기 2년 전에 이미 팽창하는 우주를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풀이로 제시하고, 그 결과 중 하나로 디지터 효과를 처음 제시한 사람이 있다. 벨기에의 사제이자 우주론자였던 조르주 르메트르(Georges Henri Joseph Édouard Lemaître, 1894‒1966)는 1927년에 <브뤼셀 과학 학술원 연보>에 프랑스어로 된 논문을 발표했다. “질량이 일정한 균질한 우주와 은하 외부의 성운들의 반지름 방향 속도를 설명하는 반지름의 증가”라는 제목의 논문이었다.

은하의 후퇴속도와 거리가 비례함을 보여주는 이 그래프는 1927년 르메트르의 논문에 실린 것이다.

이 논문에서 르메트르는 아인슈타인 중력장 방정식을 풀어 팽창하는 우주를 나타내는 풀이를 완전하게 제시했을 뿐 아니라 스웨덴의 천문학자 구스타프 스트룀베리가 1925년에 발표한 은하 외부의 성운들의 반지름 방향(사선 방향) 속도의 값을 이용하여 얻을 수 있는 디지터 효과가 자신의 풀이로부터 유도됨을 정확히 보였다. 게다가 은하의 후퇴속도와 은하까지의 거리의 비(즉 허블 상수)가 625 km/s/Mpc임을 계산해 놓았고 또한 각주에서는 데이터를 어떻게 묶는가에 따라 575 또는 670 km/s/Mpc의 값이 나올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디지터 효과는 우주가 팽창하기 때문에 생겼으리라는 추측도 명확하게 적고 있다.


허블이 1929년의 논문 발표 후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자, 벨기에 루뱅 가톨릭대학교 물리학과에서 조용히 지내던 르메트르는 케임브리지에 있을 때의 지도교수였던 아서 에딩턴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1927년 논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에딩턴은 르메트르의 논문이 지니는 의미를 뒤늦게 알아챘고, 국제 학계에서 이를 열심히 홍보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된 아인슈타인의 일화가 있다. 1927년에 솔베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브뤼셀에 간 아인슈타인은 거기에서 르메트르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평은 혹독했다. “계산은 옳지만 물리학은 형편없습니다.”(Vos calculs sont corrects, mais vôtre physique est abominable.) 그러나 5년 뒤 캘리포니아에서 다시 르메트르를 만난 아인슈타인이 그의 우주론 강연을 듣고 난 뒤 “이 강연은 제가 이제껏 들은 강연 중 창조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 만족스러운 설명입니다.”라고 극찬을 했으니 아인슈타인의 판단 능력에 의심이 가는 면도 있다. 어쩌면 에딩턴의 노력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1931년 2월에 W. M. 스마트가 르메트르에게 보낸 편지 일부.

1931년에는 르메트르의 논문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영국 왕립 천문학회가 이 논문의 영어 번역을 왕립 천문학회 월보에 싣게 되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허블 상수의 값이라든가 우주 팽창에 대한 추측을 담은 구절이 송두리째 빠져 버린 것이다. 빠진 부분은 모두 허블의 공로로 인정되는 부분이었다. 해리 너스보머와 리디아 비에리는 2009년에 출판된 저서에서 이 누락을 상세한 문서 분석과 함께 제시했다. 2011년에 캐나다의 천문학자 시드니 판덴베르흐는 르메트르의 프랑스어판 논문의 (24)번 방정식이 영어판에서 사라진 것이 의도적임을 주장했다. 같은 해에 남아프리카의 수학자 데이비드 블록은 이와 관련된 상세한 글에서 이를 ‘검열’이라고 불렀다. 

영국 왕립 천문학회 월보의 편집을 책임지고 있던 W. M. 스마트가 1931년 2월에 르메트르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1 – n”을 영어로 번역해서 보내달라고 하고 있다. 블록은 n으로 보이는 글자가 사실은 “72”라고 주장하면서 소위 허블의 법칙이 담겨 있는 §73 이하는 제외하고 그 앞까지만 번역해 달라는 요청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스마트를 비롯한 영국이나 미국의 천문학자들이 허블의 공로를 추켜세워 주기 위해 우주 팽창에 대한 추측이나 소위 허블 상수의 값을 서술한 부분을 일부러 빠뜨린 것이 된다.  


2011년 11월 마리오 리비오는 네이처에 실은 짤막한 글에서 영문 번역을 한 사람과 ‘검열’을 한 사람이 둘 다 르메트르였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1931년 3월 9일에 르메트르가 스마트에게 보낸 회신 편지에는 1927년의 데이터가 정확하지 않으므로 그 부분은 빼고 더 정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계산을 따로 보내겠다는 구절이 있다.  


블록은 2011년 여름에 올렸던 글의 수정판을 2012년에 다시 올리면서 1950년에 나온 르메트르의 회고를 새로 인용했다. 르메트르는 “이 과학적 경쟁의 역사에 무관심하지 않다”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고, 1927년 논문의 제목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외부은하까지의 거리와 후퇴 속도 사이의 관계를 정량적으로 확립하는 것이 핵심적인 목적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허블은 자신의 저서 <성운의 영역 The Realm of the Nebulae> (1936)이나 <우주론에 대한 관찰적 접근 The Observational Approach to Cos- mology>(1937)에서 르메트르를 전혀 인용하고 있지 않다. 당시의 분위기를 볼 때 1936년 무렵이면 르메트르의 공로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블이 르메트르를 전혀 인용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임에 틀림없다.


허블이 그 공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은 과학자가 또 있다. 허블의 관측은 대부분 윌슨산 천문대 직원이었던 밀턴 휴머슨과 함께 이루어졌다. 휴머슨은 어릴 때 학교를 그만두었고, 새로 생긴 윌슨산 천문대에 건축자재를 나르는 노새를 부리는 일로 처음 고용되었다가 나중에 청소부가 되었는데, 어깨너머로 배운 천문 관측 기술은 놀라웠다. 이를 알아챈 윌슨산 천문대장 조지 헤일은 여러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머슨을 ‘야간조수’라는 과학담당 전문 직원으로 승진시켰다. 윌슨산 천문대의 망원경은 휴머슨의 손길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휴머슨은 탁월한 관측천문학자였다. 휴머슨은 620여 개의 은하의 사선 방향 속도를 정확히 관찰하여 측정했다. 휴머슨의 도움이 없었다면, 허블의 법칙은 증명되기 힘들었다. 하지만 고상한 척 영국 억양을 흉내 내며 천문대에서도 승마복과 승마 신발을 신고 다니던 허블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동료를 언제나 무시하며 업신여겼다. 


지난 2018년 8월 국제천문연맹(IAU) 회의에서 ‘허블의 법칙’ 대신 ‘허블-르메트르의 법칙’이라는 이름을 쓸지 투표가 시작되었고, 결국 10월 말에 ‘허블-르메트르 법칙’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실상 ‘르메트르의 법칙’이나 ‘르메트르-허블의 법칙’으로 했어야 할 것이다. 이 법칙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설명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1948년 탄생한 빅뱅이론은 우주의 팽창에 대한 체계적인 첫 이론이다. 빅뱅이론을 만들어 우주의 탄생을 설명한 과학자에게 노벨상을 주고자 한다면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맨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러시아 출신의 게오르기 가모프(Georgiy Antonovich Gamov, 1904‒1968)일 것이다. 1934년 미국으로 망명한 가모프를 받아 준 곳은 조지워싱턴 대학이었다. 가모프는 1946년 무렵 르메트르가 제안한 우주의 탄생 시나리오를 곱씹으면서 태초의 우주는 아주 뜨겁고 빽빽한 중성자의 죽 같은 것에서 시작했으리라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가모프는 영어 사전을 뒤져 중세에 사용된 낯선 단어 ‘아일렘(ylem)’을 찾아내기도 했지만, 이 시나리오를 구체적인 수준의 이론으로 끌어올려 실제로 물질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아직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모프가 랠프 앨퍼(Ralph Asher Alpher, 1921-2007)를 만난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큰 행운이었다. 랠프 앨퍼는 15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입학허가와 장학금까지 받게 된 수재였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입학허가와 장학금이 취소되면서, 16살부터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학업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앨퍼는 조지워싱턴 대학 야간학부를 다니면서 물리학을 공부하여 학사학위를 받은 뒤 다시 대학원에 진학했다.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지니고 있던 앨퍼는 르메트르의 논문을 우연히 읽게 되면서 우주의 탄생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낮에는 해군과 존즈홉킨스 대학 응용물리실험실에서 일하면서 미사일 탄도와 유도에 대해 연구하던 야간 대학원생으로서는 그런 상아탑 속의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폭넓은 관심사를 가진 가모프는 자신에게 부족한 수학적 능력과 집요한 탐구력을 가진 앨퍼를 만나 기뻤고, 미국 전체에서 거의 유일하게 우주 탄생 시나리오에 관심을 갖고 있던 가모프를 만난 앨퍼가 자신의 박사학위논문 주제로 우주의 핵생성을 택한 것은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1948년 4월 앨퍼의 학위논문 공개심사에는 이례적으로 기자들을 포함하여 300여 명의 청중이 운집했다. 앨퍼는 비상한 노력으로 이 공개심사를 준비했다. 그런데 가모프는 납득하기 힘든 일을 저질렀다. 학위논문의 공개심사에 앞서 미국물리학회 회보에 앨퍼의 동의를 얻지 않고 논문을 투고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연구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자신의 친구 한스 베테를 중간 저자로 넣었는데, 이는 순전히 세 사람의 이름(Alpher- Bethe-Gamow)이 그리스어 첫 세 문자, 알파-베타-감마와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공동연구자였던 로버트 허먼(Robert Herman, 1914‒1997)은 알파-베타-감마의 말장난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논문의 저자에서 빠지고 말았다. 


앨퍼가 허먼을 만난 것은 존스홉킨스 대학 응용물리실험실에서 일할 때였다. 허먼이 분광학과 응집물질물리학으로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아인슈타인 중력장 방정식을 우주에 적용한 풀이를 구한 것으로 잘 알려진 하워드 로버트슨이었다. 태초의 우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반상대성이론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던 앨퍼에게 직장 동료이자 선배인 허먼은 더할 나위 없는 공동연구자였다.


엠바고를 어기고 논문 저자까지 위조한 가모프의 행동은 지금의 연구윤리에 비추어 보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앨퍼와 허먼으로서는 무척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이 주제로 박사학위를 줄 수 있는 유일한 교수가 바로 가모프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실상 우주 핵생성 문제를 푸는 데 가모프는 거의 도움을 주지 않았다. 빅뱅 우주론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앨퍼와 허먼이었고, 가모프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 도움을 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빅뱅이론을 말할 때 앨퍼와 허먼의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프레드 호일과 대적할 수 있을 만큼 저명했던 가모프만이 빅뱅이론의 대변자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또 다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허블의 법칙’이라는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1952년에 출판된 가모프의 <우주의 탄생 The Creation of the Universe> 덕분이었다는 점도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실질적인 계산과 시나리오를 통해 우주배경복사를 예측하고 설명한 앨퍼와 허먼이 아니라 이를 처음 관측한 아노 펜지아스(Arno Penzias)와 로버트 윌슨(Robert Woodrow Wilson)에게만 1978년 노벨물리학상이 수여된 것도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1993년 미국 국립학술원은 앨퍼와 허먼에게 헨리 드레이퍼 상을 수여하면서 “우주의 진화에 대한 물리적 모형을 발전시키고 우주배경복사의 존재를 예측한 공로”를 치하했다.


역사는 언제나 최고만을 기억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역사의 기억이 왜곡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주론의 역사에서도 왜곡된 기억의 문제는 제법 심각하다. 물론 새삼 덜 알려진 역사를 다시 살핀다고 해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람들의 업적을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학 연구가 혼자서 외롭게 역경을 딛고 나아가는 천재들의 영웅담인 양 여기는 것은 과학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어려운 걸음을 디디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과학은 수많은 의견 교환과 사회경제적 요인에 크게 의존하는 공동작업이다. 과학의 전개는 예측할 수 없는 역사적 우연과 계기가 만들어낸 복잡하고 미묘한 사회적 산물이다. 과학의 역사가 말해 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과학의 진보를 위해 제대로 공로도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조용히 밤샘을 해 가며 하루하루 자연의 원리와 법칙을 밝히려는 노력들을 겸허하게 축하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일부 내용은 <과학동아> 2015년 8월호에 실린 같은 필자의 글 “우주론을 바꾼 역사 뒤편의 영웅들”과 같습니다.

2019년 7월 4일
김재영(녹색아카데미)

원문출처 : 한국물리학회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165849&memberNo=38442864&searchKeyword=김재영&searchRank=3

더 읽어볼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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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 L. Block and K. C. Freeman, Shrouds of the Night (Springe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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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김재영 박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물리학 기초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 초빙교수 등을 거쳐 현재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물리철학 및 물리학사를 가르치고 있다. 공저로 『정보혁명』, 『양자, 정보, 생명』, 『뉴턴과 아인슈타인』 등이 있고, 공역으로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에너지, 힘, 물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