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상대성이론 100+4년 – 제7회. 르메트르와 앨퍼: 허블과 가모프에 가려진 우주론자들

2015년,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100세가 되었다. 특수상대성이론이 100세가 된 것은 10년 앞선 2005년이다. 일반상대성이론은 과학이론의 본성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 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과 우주와 물질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이론이면서도 동시에 실증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이론이기도 하다.

그만큼 역사적인 맥락이 풍부하며, 또한 문화적 영향도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녹색아카데미 과학칼럼에서는 일반상대성이론이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는 역사적, 철학적 과정을 9회에 걸쳐 살펴본다.

2019년 9월 24일
김재영 (녹색아카데미)

  1. 뉴턴이여, 나를 용서하시길! (8/13)
  2. 절대공간은 존재할까? (8/20)
  3. 아인슈타인과 가우스와 비유클리드 기하학 (8/27)
  4. 드디어 일반상대성이론이 만들어지다 (9/3)
  5. 일반상대성이론을 푼다는 것 (9/10)
  6. 일반상대성이론의 수용, 오해, 해석 (9/17)
  7. 르메트르와 앨퍼 : 허블과 가모프에 가려진 우주론자들 (9/24)
  8. SF와 상대성이론 (10/1)
  9.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론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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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2월 8일 프로이센 과학학술원의 학술대회에서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의 우주론적 고찰”이란 제목의 새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그가 1년 전에 새로 제안한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우주의 탄생과 변화를 서술할 수 있다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실제로 우주의 탄생과 변화를 말해 주는 풀이를 찾아내지 못했지만, 이후 프리드만 (1922, 1924), 드지터 (1932), 톨만 (1934), 로버트슨 (1929, 1935, 1936), 월커(1936) 등을 통해 우주론에 적용할 수 있는 시공간 풀이가 상세하게 밝혀졌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중력장 방정식의 수학적 풀이만으로는 상대론적 우주론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갖추어갈 수 없었다. 관측이라는 훨씬 더 중요한 버팀목이 있어야 했다.

여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에드윈 허블이다. 우주에 떠 있는 가장 중요한 우주망원경의 이름을 비롯하여 그의 이름은 팽창우주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허블 상수, 허블 시간, 특히 무엇보다도 허블의 법칙은 우주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 중 하나다. 그런데 팽창하는 우주를 정말 허블이 처음 발견한 것일까?

허블은 1920년대에 미국 천문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소위 커티스-섀플리 논쟁을 통해 하루아침에 스타과학자가 되었다. 안드로메다자리에는 고대부터 알려진 밝은 별들 사이로 희끄무레한 구름 같은 천체가 있다. 18세기 천문학자 샤를 메시에는 이런 성운이나 성단(별무리)의 일목요연한 목록을 만들었고, 안드로메다자리의 ‘성운’은 메시에가 발견한 31번째의 특이한 천체라는 뜻으로 M31(표제 사진. 그림 8 참조)이라 부른다.

[그림 1] 메시에 천체 목록. M31은 위에서 세번째, 왼쪽에서 세번째 칸에 있다. (사진 : wikipedia)

M31에 대해 할로우 섀플리는 자신이 3차원 구조를 밝혀낸 우리 은하계 안에 있는 성운이라고 주장한 반면, 헤버 커티스는 ‘섬 우주’를 주장한 이마누엘 칸트를 인용하면서 M31도 우리 은하처럼 또 다른 은하임을 주장했다. 이 대논쟁을 판가름하기 위해서는 M31까지의 거리를 재는 것이 핵심이었다.

만일 M31까지의 거리가 우리 은하의 크기보다 더 멀다면 커티스의 ‘섬 우주’가 옳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섀플리의 승리가 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결정적인 증거는 헨리에타 리빗이 밝혀낸 변광성의 광도-주기 관계에 있었다. 

[그림 2] 하버드대학교 천문대에서 일하고 있는 리빗(Henrietta Swan Leavitt, 1868~1921) (사진 : wikipedia)

하버드 대학 천문대에 소속된 관측천문학자였던 리빗은 케페우스 자리에서 발견된 변광성에서 특이한 사실을 알아냈다. 이 변광성은 며칠을 주기로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 것이 관측되었는데, 이미 알려진 별의 절대밝기 즉 광도와 일정한 상관관계를 보인다. 이런 종류의 변광성을 세페이드 변광성이라 부른다.

별의 광도를 알아낼 수 있다면 겉보기 밝기와 비교하여 별까지의 거리를 구할 수 있다. 따라서 세페이드 변광성을 발견한다면 곧 그 별까지의 거리를 정할 수 있다. 에드윈 허블이 M31을 찍은 사진 건판에 쓴 “VAR!”라는 글자는 허블이 M31에서 세페이드 변광성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말해 준다.

[그림 3] 1912년, 리빗이 준비하던 논문에 포함된 주기-광도 그래프. 가로축은 밝기가 변하는 주기의 로그값, 세로축은 밝기의 정도이다. 직선은 밝기의 가장 큰 값과 가장 작은 값을 이은 것이다. (사진 : wikipedia)

이 세페이드 변광성을 이용하여 M31까지의 거리를 구하고 나니 당시 알려져 있던 은하계의 크기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대논쟁에서 섀플리가 틀리고 커티스가 옳다는 의미가 된다.

커티스-섀플리 논쟁을 해결하여 유명세를 얻은 허블은 그 뒤 더 많은 은하들을 찾아냈고, 이 은하들이 모두 우리 은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빛띠(spectrum)의 적색이동을 이용하여 은하들의 후퇴속도를 구했다.

1929년에 미국 “국립학술원 회보”에 출판된 허블의 논문 “외부은하 성운의 거리와 사선방향 속도의 관계”의 결론부분은 자신이 찾아낸 46개의 외부 은하의 사선 방향 속도의 정확한 측정값을 이용하여 ‘드지터 효과’, 즉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일수록 멀어져 가는 속도가 거리에 비례하여 커진다는 효과를 확인하려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은하의 후퇴와 관련된 이 법칙은 드지터-허블의 법칙이라 불러야 할까?

[그림 4] 아인슈타인과 르메트르(Georges Henri Joseph Edouard Lemaître. 1894~1966) & 아인슈타인과 허블(작은 사진). 르메트르는 벨기에의 카톨릭 사제이자 수학자, 천문학자였고, 루뱅 카톨릭대학교의 물리학 교수였다. (사진 : Theoretical Physics)

그러나 역사상 처음으로 팽창하는 우주를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풀이로 제시하고, 그 결과로서 드지터 효과를 제시한 것은 다름 아니라 벨기에의 사제이자 우주론자였던 조르주 르메트르였다.

르메트르는 1927년에 “브뤼셀 과학 학술원 연보”에 “질량이 일정한 균질한 우주와 은하외부의 성운들의 반지름 방향 속도를 설명할 수 있는 반지름의 증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르메트르는 프리드만의 연구를 모르는 채로 아인슈타인 중력장 방정식을 풀어 팽창하는 우주를 나타내는 풀이를 완전하게 제시했을 뿐 아니라 스트룀베르크가 1925년에 발표한 은하 외부의 성운들의 반지름 방향(사선 방향) 속도의 값을 이용하여 얻을 수 있는 드지터 효과가 자신의 풀이로부터 유도됨을 정확히 보였다.

게다가 각주에서이긴 하지만 소위 허블 상수의 값이 575 또는 670이라는 계산도 적어 놓았고 또한 드지터 효과는 우주가 팽창하기 때문에 생겼으리라는 추측도 적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1927년에 솔베이 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브뤼셀에 간 아인슈타인이 거기에서 르메트르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계산은 옳지만 물리학은 형편없습니다.”라는 혹독한 평가를 남겼다. 이미 1917년 논문에서 우주가 팽창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중력장 방정식의 우주상수를 덧붙였던 아인슈타인으로서는 르메트르의 결론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5년 뒤 캘리포니아에서 다시 르메트르를 만난 아인슈타인이 르메트르의 강연을 듣고 난 뒤 “이 강연은 제가 이제껏 들은 강연 중 창조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 만족스러운 설명입니다.”라고 극찬을 했으니, 아인슈타인의 판단능력에 의심이 가는 면도 있다.  

허블이 1929년의 논문 발표 후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자, 벨기에에서 조용히 사제로 살아가던 르메트르는 케임브리지에 있을 때의 지도교수였던 아서 에딩턴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1927년 논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에딩턴은 르메트르의 논문이 지니는 의미를 뒤늦게 알아챘고, 국제 학계에서 이를 열심히 홍보하기 시작했다. 

1931년에는 이 논문의 중요성을 인정한 영국 왕립 천문학회가 이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여 왕립 천문학회 월보에 싣게 되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허블 상수의 값이라든가 우주 팽창에 대한 추측을 담은 구절이 송두리째 빠져 버린 것이다.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빠진 부분은 모두 허블의 공로로 인정되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허블은 자신의 저서 “성운의 영역”(1936)이나 “우주론에 대한 관찰적 접근”(1937)에서 르메트르를 전혀 인용하고 있지 않다. 그 무렵이면 르메트르의 공로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블이 르메트르를 전혀 인용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림 5] 윌슨산 천문대에서 허블과 함께 관측 중인 휴머슨. 두 사람은 우주의 팽창을 밝혀냈다. (Milton Humason, 1891~1972) (사진 : owlcation.com)

허블이 그 공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은 과학자가 또 있다. 허블의 관측은 대부분 윌슨산 천문대 직원이었던 밀턴 휴머슨과 함께 이루어졌다. 휴머슨은 어릴 때 학교를 그만 두었는데, 새로 생긴 윌슨산 천문대에 건축자재를 나르는 노새를 부리는 일로 처음 고용되었다가 나중에 청소부가 되었는데, 어깨 너머로 배운 천문관측 기술은 놀라웠다. 

이를 알아챈 윌슨산 천문대장 조지 헤일은 여러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머슨을 ‘야간조교’라는 과학담당 전문직원으로 승진시켰다. 윌슨산 천문대의 망원경은 휴머슨의 손길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휴머슨은 탁월한 관측천문학자였다.

휴머슨은 620여 개의 은하의 사선방향 속도를 정확히 관찰하여 측정했다. 휴머슨의 도움이 없었다면, 허블의 법칙은 증명되기 힘들었다. 하지만 고상한 척 영국 억양을 흉내내며 천문대에서도 승마복과 승마신발을 신고 다니던 허블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동료를 언제나 무시하며 천대했다. 

르메트르의 업적은 허블 이전의 은하 후퇴 법칙과 디지터와 거의 동시에 찾아낸 우주 팽창에서 멈추지 않는다. 르메트르는 사실상 처음으로 뜨거운 우주 탄생 모형을 제안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이디어 수준이었고 더 체계적인 이론으로 발전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르메트르의 제안을 출발점으로 삼아 태초의 우주가 매우 뜨겁고 밀도가 높았다는 소위 빅뱅이론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맨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러시아 출신의 게오르기 가모프일 것이다. 1934년 미국으로 망명한 가모프를 받아 준 곳은 조지워싱턴 대학이었다.

[그림 6] 게오르기 가모프 (Gerogiy Antonovich Gamov, 1904~1968) (사진 : wikipedia)

가모프는 1946년 무렵 르메트르가 제안한 우주의 탄생 시나리오를 곱씹으면서 태초의 우주는 아주 뜨겁고 빽빽한 중성자의 죽 같은 것에서 시작했으리라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영어 사전을 뒤져 중세에 사용된 낯선 단어 ‘아일렘(ylem)’을 찾아낼 정도였지만, 가모프는 이 시나리오를 구체적인 수준의 이론으로 끌어올려 실제로 물질이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가모프의 제자 랠프 앨퍼와 로버트 허먼이었다. 랠프 앨퍼는 15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입학허가와 장학금까지 받게 된 수재였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마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갑자기 입학허가와 장학금이 취소되면서, 16살부터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학업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앨퍼는 조지워싱턴 대학 야간학부를 다니면서 물리학을 공부하여 학사학위를 받은 뒤 다시 대학원에 진학했다.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지니고 있던 앨퍼는 르메트르의 논문을 우연히 읽게 되면서 우주의 탄생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낮에는 해군과 존스홉킨스 대학 응용물리실험실에서 일하면서 미사일 탄도와 유도에 대해 연구하던 야간 대학원생으로서는 그런 상아탑 속의 이론을 공부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폭넓은 관심사를 가진 가모프는 자신에게 부족한 수학적 능력과 집요한 탐구력을 가진 앨퍼를 만나 기뻤고, 미국 전체에서 거의 유일하게 우주 탄생 시나리오를 연구하고 있던 가모프를 만난 앨퍼가 자신의 박사학위논문 주제로 우주의 핵생성을 택한 것은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1948년 4월 앨퍼의 학위논문 공개심사에는 이례적으로 기자들을 포함하여 300여 명의 청중이 운집했다. 앨퍼는 비상한 노력으로 이 공개심사를 준비했다. 그런데 가모프는 납득하기 힘든 일을 저질렀다. 학위논문의 공개심사에 앞서 미국물리학회 회보에 앨퍼의 동의를 얻지 않고 논문을 투고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연구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자신의 친구 한스 베테를 중간 저자로 넣었는데, 이는 순전히 세 사람의 이름(Alpher-Bethe-Gamow)이 그리스어 첫 세 문자, 알파-베타-감마와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공동연구자였던 로버트 허먼은 알파-베타-감마의 말장난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논문의 저자에서 빠지고 말았다.

앨퍼가 허먼을 만난 것은 존스홉킨스 대학 응용물리실험실에서 일할 때였다. 허먼이 분광학과 응집물질물리학으로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아인슈타인 중력장 방정식을 우주에 적용한 풀이를 구한 것으로 잘 알려진 하워드 로버트슨이었다. 태초의 우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반상대성이론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던 앨퍼에게 직장 동료이자 선배인 허먼은 더할 나위 없는 공동연구자였다.

[그림 7] 랠프 앨퍼(왼쪽. Ralph Asher Alpher, 1921~2007)와 로버트 허먼(Robert C. Herman, 1914~1997), 1940’s. (사진 : arxiv.org)

엠바고를 어기고 논문 저자까지 위조한 가모프의 행동은 지금의 연구윤리에 비추어 보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앨퍼와 허먼으로서는 무척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이 주제로 박사학위를 줄 수 있는 유일한 교수가 바로 가모프였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실상 우주 핵생성 문제를 푸는 데 가모프는 거의 도움을 주지 않았다. 빅뱅 우주론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앨퍼와 허먼이었고, 가모프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빅뱅이론을 말할 때 앨퍼와 허먼의 이름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프레드 호일과 대적할 수 있을 만큼 저명했던 가모프만이 빅뱅이론의 대변자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또 다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93년 미국 국립학술원은 앨퍼와 허먼에게 헨리 드레이퍼 상을 수여하면서 “우주의 진화에 대한 물리적 모형을 발전시키기고 우주배경복사의 존재를 예측”한 공로를 치하했다.

역사는 언제나 최고만을 기억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역사의 기억이 왜곡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반상대성이론의 역사에서도 왜곡된 기억의 문제는 제법 심각하다. 새삼 덜 알려진 역사를 들추어낸다고 해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람들의 업적을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학 연구가 혼자서 외롭게 역경을 딛고 나아가는 천재들의 영웅담인 양 생각하는 것은 과학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어려운 걸음을 디디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과학은 많은 의견교환과 사회경제적 요인에 크게 의존하는 공동작업이다. 과학의 전개는 예측할 수 없는 역사적 우연과 계기가 만들어낸 복잡하고 미묘한 사회적 산물이다.  

지난 100년의 일반상대성이론이 말해 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나 과학을 하는 것이 천재들의 영웅담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진보를 위해 제대로 공로도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조용히 밤샘을 해 가며 하루하루 세계의 원리와 법칙을 밝히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겸허하게 이를 축하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림 8] 안드로메다 은하로 불리는 M31. 지구로부터 250만 광년 떨어져있다. (사진 : wikipedia)

다음 회 : 8. SF와 상대성이론 (10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