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전이와 란다우 평균마당 이론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6장과 7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상 전이입니다.
지구상에서 물질의 세 가지 상태(狀態, phase)로 존재합니다. 각각 고체(solid), 액체(liquid), 기체(gas)라 부릅니다. H2O 분자로 이루어진 물질의 경우 얼음, 물, 수증기로 부릅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나 인도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엠페도클레스가 세상의 물질을 이루고 있는 근본적인 요소, 즉 아르케 또는 뿌리(리조마타)로 네 가지를 제안할 때 나온 것이 바로, 흙(terra), 물(aqua), 바람(aer), 불(ignis)이었습니다. 불도 요즘 흔히 말하는 네 번째 상태, 즉 플라즈마를 염두에 두면, 엠페도클레스-아리스토텔레스의 네 원소와 네 상태가 서로 맞대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 과학, 특히 물리학이나 화학을 접하게 될 때 혼동스러운 용어들이 꽤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상태'라는 용어입니다.
고전역학을 윌리엄 해밀턴에 따라 재서술할 때 나오는 것이 운동의 상태 개념입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와 그 동안의 세미나에서 분명해진 것처럼, 고전역학의 상태란 다름 아니라 특정 시각의 위치와 운동량의 값 $(x (t) , p (t))$입니다. 영어로는 state of motion 또는 그냥 state라 쓰고, 프랑스어로는 état, 독일어로는 Zustand라 씁니다. 양자역학에서는 이것을 추상적인 복소수값 함수로 쓰기 때문에 상태함수가 됩니다.
그런데 물질이 존재하는 양상 내지 양태 내지 방식도 '상태'라 부릅니다. 이 때의 영어 용어는 phase입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도 이와 유사하게 phase, Phasen입니다. 실상 고체/액체/기체를 가리키는 '상태'와 고전역학이나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상태'는 직접 관련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두 개념을 같은 용어로 쓰고 있어서 자주 혼동이 됩니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phase의 경우 그냥 '상(狀)'이라 부를 때가 많습니다.
파동에 대해 말할 때 삼각함수의 입력으로 들어가는 값도 '위상 位相 phase'이라 부릅니다. 이 때의 phase는 물질의 상태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게다가 우연히 '상'이란 글자가 있지만 한자를 보면 상태(狀態)의 '상(狀)'과는 전혀 다릅니다. 수학에서는 함수의 결과물을 상(像 image)이라 부릅니다. 한국어로는 모두 '상'이지만 전부 의미가 다르니 무척 혼동스럽습니다.
고체와 액체와 기체 사이에 서로 변환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흔히 연금술(alchemy)이라 부르는 여러 접근들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중세 이슬람과 기독교 유럽권에서 내내 탐구되어 왔습니다. 끓이고 태우고 증발시키고 승화시키는 등 복잡해 보이는 화학적 작용이 상세하게 알려졌습니다. 여기에서 상의 변화 개념이 정립되었는데, 이를 '상 전이(phase transition)'라 부릅니다.
상 전이 자체는 매우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졌고 실험실에서 늘상 확인하는 현상이었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 것은 100년이 채 안 되었습니다. 그 바탕에 바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6장에서 상세하게 다루는 바로 그 '통계역학'이 놓여 있습니다.
19세기 초부터 유럽에서 열 및 온도와 관련된 현상에 주목한 것은 아마 거의 틀림없이 증기기관과 같은 열기관 덕분이었을 겁니다. 이미 18세기말부터 광범위하게 증기기관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산업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요즘 컴퓨터, A.I., 로봇, 인터넷, 스마트폰 같은 것이 새로운 기술의 상징이라면, 19세기 초에 가장 상징적인 기술은 다름 아니라 증기기관이었습니다.
당시 자연철학자들이 증기기관의 원리에 주목한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열역학(thermodynamics)입니다. 그러나 열역학은 기존의 고전역학과 별개의 법칙들을 주장했고,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가령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루트비히 볼츠만, 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통계역학입니다. 이것은 대상을 많은 수의 구성원(입자, 분자, 원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한 뒤에, 여기에다 기본역학과 확률통계이론을 적용하는 이론적 접근입니다.
가령 헬름홀츠 자유에너지나 기브스 자유에너지는 열역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온도와 압력과 부피와 구성원의 개수에 따라 이런 자유에너지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려 했기 때문입니다.
열역학에서는
$$ F (N, V, T) = U - TS$$
와 같이 내부에너지, 엔트로피, 온도, 압력, 부피 등이 주된 관심입니다. 그런데 통계역학에서는 특정 거시상태를 이루는 미시상태의 수라는 놀라운 개념을 통해, 가령
\begin{align} F( N, V, T) &= - kT \log Z \\ Z &= \sum_r \exp (-\beta E_r ) \end{align}
과 같은 새로운 표현을 얻었습니다. 대상계의 에너지들의 분포를 알면 그로부터 자유에너지를 확률-통계 이론을 써서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유익함 중 하나가 바로 상전이의 설명입니다. 장회익 선생님께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만, 저는 조금 더 표준적인 물리학 교과서에서 이야기되는 것을 짧게 소개하려 합니다.
1937년 러시아(당시는 소비에트 연방)의 물리학자 레프 다비다비치 란다우(Лев Давидович Ландау, 1908-1968)는 통계역학적인 자유에너지를 이용하여 상전이를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매우 탁월한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자유에너지를 질서 변수(order parameter)의 함수로 쓰는 것입니다. 여러 이유로 흔히 평균마당 이론(mean field theory)이라 부릅니다.
(참고: https://en.wikipedia.org/wiki/Landau_theory )
Lev D. Landau (1937). "On the Theory of Phase Transitions". Zh. Eksp. Teor. Fiz. 7: 19-32.]
이 자유에너지의 함수 모양을 이용하여 상 전이의 일반이론을 만들어냈으니 란다우는 매우 뛰어난 물리학자임에 틀림없습니다. 1962년에 액체 헬륨의 초유동을 설명하는 수학적 이론의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이렇게 기가 막힌 이론을 발표한 이듬해에 란다우는 갑자기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끌려갑니다. 당시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최고지도자는 요제프 스탈린이었는데, 사석에서 소련의 상황이 히틀러의 나치나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비슷하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입니다. 란다우는 1932년부터 카르키프 물리학-기술 연구소[Kharkiv Institute of Physics and Technology (KIPT)]의 이론물리학 분과를 책임지고 있다가, 1937년에 "물리학 문제 연구소(Институт физических проблем)" 이론물리학 분과로 옮겨갔습니다. 이 연구소는 저명한 물리학자 표트르 카피차가 1934년에 설립한 기관이었습니다. 란다우는 1938년 4월에 강제수용소에 잡혀갔는데, 카피차는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서 란다우를 옹호하면서 란다우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연구소 소장직을 사임하겠다고 스탈린을 설득했습니다. 란다우는 1년 동안 강제수용소에서 고생하다가 거의 만 1년만에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림 출처: https://users.aber.ac.uk/ruw/teach/334/landau.php )
위의 그림에서 $T_c$라고 쓴 것은 임계온도(臨界溫度, critical temperature)라 부릅니다. 이 온도보다 높을 때에는 주황색이 되어서 질서변수라는 것이 0이 됩니다. 그런데 점점 온도가 내려가서 임계온도보다 낮아지면 갈색처럼 되어서 최소 위치가 달라집니다. 흔히 극소(local minimum)이라 부릅니다. 자유에너지가 극소가 될 때 질서변수의 값은 0이 아닙니다.
질서변수라는 개념이 쉽게 설명되지는 않지만, 대략 말하면 잘 정렬된 정도의 크기를 가리킵니다. 질서변수가 0이라는 것은 제멋대로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고, 질서변수가 0이 아닌 유한한 값이라면 그 크기만큼 덩어리가 져서 뭉텅이들이 함께 다닌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소금물은 온도가 높을 때에는 아주 묽은 용액입니다. 소금물이 식으면서 점점 소금이 석출되어 여기 저기 소금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질서변수가 없는 것이 아주 묽은 용액이라면, 온도가 내려가서 여기 저기 덩어리가 지어져 있는 것이 질서변수가 0이 아닌 경우입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대담 녹취록 6-4중에서 제목이 "국소실서의 형성"이라고 되어 있는 그림의 세로축이 자유에너지라면, 가로축은 대략 질서변수에 해당합니다. 대담에서는 장회익 선생님께서 이야기를 간단하게 풀어나가시기 위해 '장벽'이란 개념을 계속 쓰셨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온도가 내려감에 따라 질서변수가 0이 아니게 되면서 상전이가 일어나는 것으로 서술하는 게 낫겠습니다.
이와 같이 온도가 변함에 따라 자유에너지와 질서변수 사이의 함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은 대개 란다우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평균마당이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란다우는 이 아이디어를 초전도체에 적용하여 새로운 이론을 1950년대에 발전시켰습니다. 이 때 공동연구자가 비탈리 긴즈부르그(Вита́лий Ла́заревич Ги́нзбург 1916-2009)입니다. 긴즈부르그는 이 연구의 공로로 2003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전개된 란다우-긴즈부르그 이론을 미국의 물리학자 필립 앤더슨(Philip W. Anderson 1923-2020)이 1962년에 소위 게이지 대칭성을 지니는 경우에 적용하여 질량의 기원을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1964년에 적어도 세 그룹에서 이 아이디어를 제대로 발전시켜 완결된 메커니즘을 고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맨 먼저 성공한 그룹은 캐나다의 로버트 브라우트(Robert Brout)와 프랑스와 엉글레르(François Englert)였습니다. 두 달쯤 뒤에 영국의 피터 힉즈(Peter Higgs)가 비슷한 아이디어의 논문을 발표했고, 다시 두 달쯤 뒤에 미국의 제럴드 구랄닉(Gerald Guralnik), 칼 헤이근(C. R. Hagen), 톰 키블(Tom Kibble)도 유사한 논문을 냈습니다. 종종 이야기되는 동시발견의 예입니다.
이 이론에서 흔히 멕시코 모자 모양의 퍼텐셜 함수가 등장합니다.
(그림 출처: https://bit.ly/2PM2KkQ )
이와 같이 양자마당의 퍼텐셜 함수의 모양을 통해 질량 없는 입자가 질량을 얻게 만드는 메커니즘의표준적인 이름은 브라우트-엉글레르-힉즈 메커니즘 또는 BEH 메커니즘입니다. 흔히 힉스 메커니즘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브라우트와 엉글레르가 먼저 발표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엉글레르와 힉즈가 노벨물리학상을 탔는데, 브라우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입니다.
우주론과 연관된 BEH 메커니즘은 훨씬 더 복잡합니다. 6장을 다룰 때 더 보충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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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언급하신 질서 변수라는건 엔트로피를 말씀하시는건가요? 맥락상 그리 보이는데...
란다우 이론에서 질서 변수(order parameter)는 엔트로피가 아닙니다. 란다우-긴즈부르그 이론을 자성에 대해 적용하면 질서 변수는 거시적 자기화의 크기입니다. 초전도 관련 이론에서는 초전도성을 나타내는 복소수 함수입니다. 이 이론을 액체-기체 상전이, 가령 물과 수증기의 상전이에 굳이 적용한다면 질서 변수는 원자 사이의 간격쯤 될 텐데 정의하기도 어렵고 유용하지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