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분포(바른틀 분포)의 간략한 유도
양자역학의 계산에서는 실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이상화되고 완벽하게 조건이 갖추어진 경우를 생각하고 그와 관련된 문제를 풀어냅니다. 그런 점에서 장회익 선생님께서 "거칠게 노는 소를 길들여야 쓰는데, 길을 어떻게 들이느냐가 문제다"라고 평가하신 것이 적절합니다.
양자역학은 말 그대로 가장 이상적인 상황에서 가능한 측정값들의 후보, 가능한 상태들의 후보만을 말해 줍니다. 통계역학은 여기에 덧붙여 많은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대상이 실제 세상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 말해 줍니다.
아래 그림은 라이언 리스(Ryan Reece)라는 철학자가 그림으로 나타낸 것인데, 약간의 왜곡이 없지는 않지만, 상당히 그럴듯합니다.
(그림 출처: http://philosophy-in-figures.tumblr.com/ )
세상의 근본 원리를 말해 주는 어떤 근원적인 이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맨 밑에 깔린 동그라미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하간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자연철학적 이론은 양자역학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동그라미입니다. 양자역학이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세계를 그대로 말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고전역학이라는 형태로 세상을 서술해 줍니다. 그래서 현실의 일상에서는 고전역학으로 건물도 짓고 배도 만들고 걸어다니기도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더 올라가야 합니다. 물질로 이루어진 현실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가 바로 온도입니다. 그런 상황을 다루는 이론이 열역학입니다. 양자역학이든 고전역학이든 그렇게 많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대상을 서술해 주는 근본적인 방법이 바로 통계역학(Statistical Mechanics)입니다. 조금 더 확장하면 우주론과 천체물리학도 통계역학의 방법을 적용한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
통계역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접근이 바로 정준분포(바른틀 분포 canonical distribution)입니다. 조사이어 기브즈는 1902년 특정 거시상태에 대응하는 여러 미시상태들의 수를 세기 위해 '앙상블(ensemble)'이라는 특이한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아주 오래 전이지만 열통계역학을 처음 배울 때 이 '앙상블' 개념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 쉽게 설명되는 개념은 아닙니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모든 것이 똑같이 준비된 계를 복제본들입니다. 윷놀이의 경우라면 윷이 네 개 있는데, 이것이 앙상블입니다. 기체의 경우는 22.4리터 정보 되는 부피 안에 10의 23제곱 개 정도의 분자가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의 여섯 배 정도가 됩니다. 이 수를 아보가드로의 수라 부릅니다. 10의 8제곱이 억(億)이고, 10의 12제곱이 조(兆), 10의 16제곱이 경(京), 10의 20제곱이 해(垓), 10의 24제곱이 자(秭)이니까, 조의 조배 정도가 자입니다. 하여튼 매우 큰 수입니다.
이 앙상블 중에서 가장 표준적인 것을 정준분포(바른틀 분포 canonical distribution)라 부릅니다. 이것은 그렇게 수없이 많은 복제본 계들이 열 저장소에 있는 상황입니다. 열 저장소(heat reservoir)라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대상계와 에너지를 주고받긴 하지만, 그 열 저장소 자체의 에너지는 변화가 없는 가상의 계를 가리킵니다. 이론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끌어들이는 개념입니다.
앞에서 계를 두 부분계로 나누어 생각해서 온도의 역수를
$$ \beta = \frac{\partial \log W}{\partial E}$$
와 같이 도입했고,
$$ \beta = \frac{1}{k T}$$
임을 주장했습니다.
이번에는 대상계가 열 저장소와 열평형을 이루고 있는 상황을 생각합니다. 즉 대상계는 닫힌 계라서 물질의 출입은 없고 단지 에너지 출입만 가능하다고 가정합니다. 앙상블 중에서 $r$번째 대상계의 에너지를 $E_r$이라 하면, 에너지 보존법칙에 따라
$$ E_r + E'_r = E^{(0)}=\mbox{const}$$
입니다. 여기에서 $E'_r$은 열 저장소의 에너지입니다.
이제 앙상블 중에서 대상계의 에너지가 하필 $E_r$일 확률 $P_r$을 구하기로 합니다.
대상계의 에너지는 고정되어 있으니 다른 무엇을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은 그 대상계가 주변의 열 저장소와 열 평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열 저장소가 워낙 크고 그 가능한 미시상태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 \frac{E_r}{E^{(0)}} = \left( 1 - \frac{E'_r}{E^{(0)}}\right) \ll 1 $$
이라는 조건이 충족됩니다.
앙상블 중에서 대상계의 에너지가 하필 $E_r$일 확률 $P_r$은 열 저장소의 에너지가 $E^{(0)}-E_r$인 미시상태의 수에 비례할 겁니다. 즉
$$ P_r \propto W' (E^{(0)}-E_r )$$
위의 조건을 이용하여 이 식을 테일러 전개하여 근사식을 찾으려 합니다.
테일러 전개는
$$ f(x) = f(a) + \frac{df}{dx} (x - a) + \frac{1}{2} \frac{d^2 f}{dx^2} (x-a)^2 + \frac{1}{3!} \frac{d^3 f}{dx^3} (x-a)^3 + \cdots $$
로 주어집니다. $(x-a)$가 1보다 작다면 제곱하고, 세제곱하고, 거듭제곱을 할수록 더 작아지므로 뒤에 나오는 항들은 무시하고 앞의 것만 가져다 쓰는 근사(어림)가 가능해집니다.
테일러 전개의 수렴 등 여러 가지 이유로 $W' (E^{(0)}-E_r )$ 대신 $\log W' (E^{(0)}-E_r )$의 테일러 전개를 사용합니다.
$$ \log W' (E^{(0)} - E_r ) = \log W' (E^{(0)}) + \frac{\partial \log W' }{\partial E_r} ( E^{(0)} - E_r ) + \cdots = \mbox{const} - \beta' E_r + \cdots $$
뒤의 등호에서는
$$ \beta = \frac{\partial \log W}{\partial E}$$
라는 정의식을 가져다 썼습니다.
그런데 대상계가 열 저장소와 열평형을 이루고 있다고 가정했으므로
$$ \beta = \beta'$$
입니다. 결국
$$ \log W' \approx \mbox{const} - \beta E_r$$
을 얻습니다.
로그함수와 지수함수는 다음과 같은 관계를 갖습니다.
$$ a = \log b \quad \leftrightarrow \quad b = e^{a}$$
따라서
$$ P_r \propto W' (E^{(0)}-E_r ) = e^{\log W' } \propto e^{-\beta E_r}$$
편리하게 쓰기 위해 비례계수를 $1/Z$라고 쓰기로 합니다. 즉
$$ P_r = \frac{1}{Z} e^{-\beta E_r}$$
앞의 상수를 계산하기 위해, 확률을 모두 더하면 1이 됨을 이용합니다. 즉
$$ \sum_r P_r = \sum_r \frac{1}{Z} e^{-\beta E_r} = 1$$
이므로
$$ Z = \sum_r e^{-\beta E_r}$$
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 P_r = P(E_r ) = \frac{1}{Z} e^{-\beta E_r}$$
을 얻습니다.
간단하게
$$ P_r = \frac{\exp (-\beta E_r)}{\sum_r \exp (-\beta E_r )}$$
로 쓸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Z$를 분배함수라 부르는데, 통계역학 계산에서 가장 중요한 함수입니다. 헬름홀츠 자유에너지를 분배함수로 쓰면,
$$ F (N, V, T) = - kT \log Z$$
가 됩니다. 헬름홀츠 자유에너지를 구하고 나면, 사실상 모든 열역학 함수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평형 통계역학의 계산 문제는 대부분 분배함수의 계산으로 치환됩니다.
-------------
수소원자의 예에서 양자역학으로 풀면 수소원자의 에너지는
$$ E_n = - \frac{m_e e^4}{2 (4\pi \epsilon_0)^2 \hbar^2} \frac{1}{n^2} \approx (-13.6 \mbox{eV})\frac{1}{n^2} \quad (n=1, 2, \cdots)$$
로 주어짐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n=1$일 때를 바닥상태라 부르고, $n=2$일 때를 첫째 바닥상태라 부릅니다.
이 두 상태에 있을 확률의 비를 구한 것이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도 잘 설명되어 있고, 대담에도 잘 나옵니다. (슬라이드에는 오타가 있습니다. $E_2 = 3.4$ eV)
$$ \frac{P(E_2)}{P(E_1)} = \frac{ \exp(-\beta E_2)}{\exp (-\beta E_1)} = e^ {-\beta (E_2 - E_1 ) } \approx e^{-40 \times (13.6 - 3.4)} = e^{-408} = 6.4 \times 10^{-178} $$
즉 수소원자의 경우 바닥상태에 있을 확률에 비해 첫째 들뜬 상태에 있을 확률은 소수점 아래 178자리까지 가야 비로소 0이 아닌 수가 나오는 매우 작은 값입니다. 쉽게 말해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수소원자는 언제나 바닥상태에 있으리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이 계산에서 상온에 해당하는 $k T$의 값을 1/40 전자볼트(eV)로 어림하는데, 그 계산을 아래 보이겠습니다. 에너지의 단위로 1 줄(J)은 전하량이 1쿨롬인 전하가 1볼트의 전압에 걸려 있을 때의 전기 위치에너지입니다. 에너지의 단위로 1 전자볼트(eV)는 전자 하나가 1볼트의 전압에 걸려 있을 때의 에너지입니다. 전자의 전하는 1.602176634×10−19 C이므로 결국
1 eV = 1.602176634×10−19 J
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볼츠만 상수가 정확히 $k=$1.380649×10−23 J/K이므로 이 값을 넣으면
$k=$8.617333262145×10−5 eV/K이 됩니다.
온도가 섭씨 18도 즉 291 켈빈(K)일 때
$k T =$ 8.6×10−5 × 291 eV = 0.025 eV
이므로
$\beta = 1/ k T$= 40 (1/eV)
가 됩니다.
고체물리학을 주로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기본 상식으로 상온은 에너지 단위로 대략 1/40 전자볼트(eV)라고 암기하고 있습니다.
[참고: https://en.wikipedia.org/wiki/KT_(energ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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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시인처럼님이 링크해 주셔서 새삼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재작년 8월이니까 20개월이 넘은 글인데, 다시 보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써 놓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무렵은 2019년 11월부터 시작한 자연철학 세미나가 갑작스런 역병으로 멈추게 되었고, 어떻게든 세미나의 ‘운동량(모멘텀)’ 내지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 계속 산만한 글을 쓰던 때인 것 같습니다.
장회익 선생님과 시인처럼님과 neomay3님의 대담에 나오는 이야기에 대한 보충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역시 수식도 있고 물리학 개념이 필요해서 쉽게 읽히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