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랑크의 흑체복사 공식
이제 드디어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의 4장이 시작됩니다.
과학사 측면에서 몇 가지 보충적인 내용이 필요하리라 판단하여 여기에 글을 덧붙입니다.
129쪽: "양자역학이라는 큰 물줄기를 이끌어낸 최초의 단서는 ... 1900년 가을, 독일의 물리학자 플랑크가 혹체에서 방출되는 빛의 세기가 파장별로 어떻게 분포되고 있는가를 설명하려던 데서 나왔다. 이 문제는 당시의 전자기학 이론과 통계역학을 통해 마땅히 설명이 되어야 할 것이었지만, 웬일인지 이론적 예측치가 관측된 분포 곡선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플랑크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고심하다가, 결국 전혀 이유를 알 수 없는 특별한 가정을 하나 삽입했다."
장회익 선생님의 서술은 전체적으로 적절하며 물리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만, 과학사학의 관점에서는 디테일 면에서 더 정확한 서술의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아래의 책이 양자역학의 개념적 전개를 매우 상세하고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Max Jammer (1966). The Conceptual Development of Quantum Mechanics. McGraw-Hill. (https://amzn.to/3ZDlKDw)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막스 플랑크 이전에 이미 빌헬름 빈(Wilhelm Wien 1864-1928)이 흑체복사에 대한 꽤 정확한 공식을 실험식으로 유도한 바 있습니다.
W. Wien (1896). "Uber die Energievertheilung im Emissionsspectrum eines schwarzen Korpers," Wiedemannsche Annalen der Physik 58, 662-669.
빈은 통계역학과 전자기학을 사용하여, 특히 맥스웰과 볼츠만이 유도한 기체분자의 속도 분포가 $$v^2 \exp(-v^2 /a T) dv$$로 주어지는데, 흑체 또는 공동 속의 전자기파의 에너지 분포가 $$E(\lambda, T) = g(\lambda) \exp [-f(\lambda)/T]$$로 주어지리라는 가정을 세우고, 자신이 기존에 얻은 최대변위 법칙과 맞아떨어지도록 에너지 분포식을 유도해 냈습니다.
$$E(\lambda, T) = c_1 \lambda^{-5} \exp\left(-\frac{c_2}{\lambda T}\right)$$ 또는 $$u(\nu, T) = \alpha \nu^3 \exp\left(-\frac{\beta \nu}{T}\right)$$
이 식에서 $c_1 , c_2 , \alpha, \beta$ 등은 실험으로 정해지는 계수입니다. 이를 파셴과 바너 등이 실험을 통해 확인한 것이 1899년입니다.
F. Paschen and H. Wanner, "Eine photometrische Methode zur Bestimmung der Exponentialconstanten der Emissionsfunction," Berliner Berichte 1899, pp. 5-11.
당시까지의 실험데이터와 빈의 실험식은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막스 플랑크도 빈의 논문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더 정확하게 유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접근을 시도해서 논문을 냈습니다.
M. Planck, "Uber irreversible Strahlungsvorgiinge," Berliner Bericht: 1st communication, Feb. 4, 1897, pp. 57--68; 2d communication, July 8, 1897, pp. 715-717; 3d communication, Dec. 16, 1897, pp. 1121-1145; 4thcommunication, July 7, 1898, pp. 449-476; 5th communication, May 18, 1899, pp. 440-480. These papers are summarized in his article "Uber irreversible Strahlungsvorgiinge," Annalen der Physik 1, 69-122 (1900).
논문 투고일을 보면 1897년 2월 4일, 7월 8일, 12월 16일, 1898년 7월 7일, 1899년 5월 18일로 무려 다섯 편의 논문을 실었습니다. 2년 넘게 이 문제에 매달려서 계산을 더 발전시켜 왔습니다.
가령 양자역학 교과서로 Nouredine Zettili (2007). Quantum Mechanics: Concepts and Applications. Wiley. p.6에 다음과 같은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 출처: Nouredine Zettili (2007). Quantum Mechanics: Concepts and Applications. Wiley. p.6)
이 그림을 보면 진동수가 작은 영역 즉 파장이 긴 영역에는 레일리-진즈 공식이라는 게 있는데, 장파장에서 잘 맞는 레일리-진즈 공식과 단파장에서 잘 맞는 빈의 공식을 합하여 모든 파장에서 잘 맞는 공식을 만든 것이 플랑크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플랑크의 논문이 발표된 것이 1899년 10월과 12월이고, 레일리의 논문이 발표된 것은 1900년 6월이며 이 논문에서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 내용을 진즈가 발표한 것이 1905년이기 때문에 상황이 좀 납득이 안 됩니다.
John William Strutt, Baron Rayleigh (1900). "Remarks upon the law of complete radiation," Philosophical Magazine 49, 539-540.
J. H. Jeans, (1905). "On the partition of energy between matter and ether," Philosophical Magazine 10, 91-98.
(게다가 진즈의 논문에서 무슨 특별히 새로운 내용이 더 있는 게 아니라 "It seems to me that Lord Rayleigh has introduced an unnecessary factor 8 by counting negative as well as positive values of his integers."라는 문장 하나가 있을 뿐이어서, 이 공식을 레일리-진즈 공식이라 부르는 것은 좀 과도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또 빈의 공식이 진동수가 작은 영역 또는 파장이 긴 영역에서 전혀 맞지 않는 것으로 나옵니다. 실제로 이런 공식은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앞에서 제시한 공식 $$u(\nu, T) = \alpha \nu^3 \exp\left(-\frac{\beta \nu}{T}\right)$$에서 진동수가 작은 영역에서는 플랑크의 공식과 비슷하게 점차 에너지 밀도가 0에 가까워집니다. 빈의 공식은 1899년 이전의 데이터와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그림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림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 )
그러던 중 독일의 새 첨단연구소 물리기술제국연구소(Physikalisch-Technischen Reichsanstalt, PTR)의 교수였던 오토 룸머(Otto Lummer 1860-1925)와 에른스트 프링스하임(Ernst Pringsheim 1859-1917)이 흑체복사와 관련된 더 정교한 측정에 성공합니다. 이 데이터는 당시 전세계에서 오직 물리기술제국연구소에서만 얻을 수 있었던 아주 정교한 실험결과였습니다.
(출처: https://bit.ly/3zYKL33 H. Rubens and F. Kurlbaum (1900). Über die Emission langwelliger Wärmestrahlen durch den schwarzen Körper bei verschiedenen Temperaturen, in: Sitzungsberichte der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1900, Gesamtsitzung vom 25. Oktober, 929-941; H. Rubens and F. Kurlbaum (1901). "Anwendung der Methode der Reststrahlen zur Prüfung des Strahlungsgesetzes". Annalen der Physik 4, 649-666.)
플랑크는 이미 빈의 접근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단지 루벤스, 쿠를바움, 프링스하임 등이 매우 정교하게 측정한 새로운 데이터를 설명하기 위해 빈의 접근을 더 발전시켰습니다. 그런 면에서 플랑크가 공식을 얻는 과정에서 "전혀 이유를 알 수 없는 특별한 가정"을 삽입했다는 서술은 부정확합니다. 플랑크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흑체복사 공식을 적절하게 유도했습니다.
플랑크는 이 새로운 데이터를 설명하기 위한 논평을 준비하는 중에 올바른 흑체복사 공식 $$u(\nu, T) =\frac{8\pi\nu^2}{c^3}\frac{h\nu}{e^{h\nu/kT}-1}$$을 얻었습니다.
플랑크의 논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M. Planck, “Über eine Verbesserung der Wienschen Spektralgleichung”, Verhandlungen der Deutschen Physikalischen Gesellschaft 2, 202-20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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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체복사를 공동 안의 공명(cavity resonance)이라고 보면, 복사 에너지 밀도 $u(\nu, T)$와 진동자의 에너지가 $$u(\nu, T) = \frac{8\pi\nu^2}{c^3} U$$와 같은 관계를 가짐을 유도할 수 있다. 만일 맥스웰-볼츠만의 등분배정리를 만족한다면 $U = kT$이므로 흑체복사의 에너지 분포가 $$u(\nu, T)=\frac{8\pi\nu^2}{c^3} kT$$로 주어진다. (이는 레일리와 진즈의 유도 결과와 같다.) 이렇게 에너지가 온도에 비례한다면, 온도와 엔트로피의 도함수 사이에 $$\frac{1}{T}=\frac{\partial S}{\partial U}$$의 관계가 있으므로, $$\frac{\partial^2 S}{\partial U^2} = -\frac{\alpha}{U^2}$$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alpha$는 임의의 상수이다.) 하지만 빈의 실험식을 얻기 위해서는 엔트로피의 식이 $$S = \frac{U}{a\nu}\log\frac{U}{eb\nu}=\frac{U}{a\nu}\left(\log\frac{U}{b\nu}-1\right)$$라고 가정해야 하며, 이 때 $$\frac{\partial^2 S}{\partial U^2} = \frac{\alpha'}{U}$$가 된다. ($\alpha'$은 임의의 상수)
이 두 경우의 절충으로 엔트로피의 에너지에 대한 도함수가 그 중간 형태인 $$\frac{\partial^2 S}{\partial U^2} = - \frac{a b}{U (U+b)}$$와 같은 관계를 만족한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a$, $b$는 앞의 식에 나오는 것과 무관한 임의의 상수) 이 식을 적분하면 $$\frac{1}{T}=\frac{\partial S}{\partial U}= a \log\frac{U+b}{U}$$이므로 이를 정리하면 $$U=\frac{b}{e^{1/aT} -1}$$를 얻는다. 빈의 변위법칙을 이용하면 $$U = \nu f(\nu/T)$$와 같이 온도 의존이 항상 $\nu/T$의 함수로 주어진다. 따라서 $$U=\frac{A \nu}{e^{B \nu/T}-1}$$을 얻을 수 있다. ($A$, $B$는 재조정된 상수) 이제 $A$ 대신 $h$라 쓰고, $A/B=k$라 하면, 이 식은 $$U=\frac{h \nu}{e^{h \nu/kT}-1}$$라 쓸 수 있다.
따라서 이로부터 복사에너지밀도를 구하면 $$u(\nu, T)=\frac{8\pi\nu^2}{c^3} \frac{h \nu}{e^{h\nu/kT}-1}$$를 얻는다. 이렇게 하여 빈의 실험식을 개선하면 루벤스와 쿠를바움의 새로운 실험결과를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험결과를 이용하여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수 $h$, $k$를 구하면 이것이 다름 아니라 각각 플랑크 상수와 볼츠만 상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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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된 더 상세한 이야기가 "막스 플랑크와 양자불연속 논쟁" [https://bit.ly/42V8j53]에 있습니다. 아래의 글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과학의 결정적 순간들] 1900년 베를린, 플랑크의 ‘양자 혁명’" (이상욱 Horizon 2019.4.25) https://horizon.kias.re.kr/9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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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쪽의 서술내용과 관련하여 "보어 원자 모형의 탄생 1913"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1) 덴마크의 과학자 닐스 보어, 러더퍼드를 만나다
https://greenacademy.re.kr/archives/645
(2) 코펜하겐으로 돌아간 보어, 자신의 원자 모형을 만들다
https://greenacademy.re.kr/archives/757
(3) 1913 ‘위대한 3부작’
https://greenacademy.re.kr/archives/7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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