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양자지우개 실험
다음 장치는 마흐-첸더 간섭계를 이용한 양자지우개 실험입니다.
[그림 출처: https://www.thorlabs.us]
실제 실험실에서 손쉽게 할 수 있는 실험입니다. 레이저(1)로 빛을 쏘고 빛살가르개(3a)로 일부는 빛이 투과하고 일부는 반사하게 만듭니다. 두 개의 거울(5)로 반사시켜서 두 번째 빛살가르개(3b)로 보냅니다. 두 경로가 있습니다.
[u1] 직진-반사(3a)-직진-반사-직진-투과(3b) [u2] 직진-반사(3a)-직진-반사-직진-반사(3b)
[v1] 직진-투과(3a)-직진-반사-직진-반사(3b) [v2] 직진-투과(3a)-직진-반사-직진-투과(3b)
위의 그림에서 윗쪽에 놓인 스크린을 보면, 빛이 도달하는 경로는 [u2]와 [v2]입니다. 만일 이 두 경로의 차이가 빛의 파장의 정수배라면 보강간섭이 일어나고 그 경로차가 빛의 반파장의 홀수배라면 소멸간섭이 일어납니다. 실제로 그 경로를 미세하게 조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스크린에는 밝은 고리와 어두운 고리가 교대로 나타나는 결과를 얻습니다.
[그림 출처: https://www.lighttrans.com/use-cases/application/mach-zehnder-interferometer.html ]
위의 실험 세팅에서는 빛의 간섭무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편광기(4)를 놓으면, 편광에 따라 빛을 걸러낼 수 있기 때문에, 어느 길로 갔는지 판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간섭무늬가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빛의 경로 중간에 편광기(4)를 놓음으로써 어느 길 정보(welcher-Weg information)를 얻을 수 있고, 그렇게 하면 간섭무늬가 사라집니다.
이 상황은 겹실틈 실험과 같습니다. 두 실틈을 모두 열어 놓으면 간섭무늬 패턴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두 실틈 중 어느 쪽을 지나갔는지 확인하면 결과적으로 간섭무늬 패턴이 사라집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는 게 올바른지는 이미 이야기가 많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상황은 두 번째 빛살가르개 위에 세 번째 편광기(4')를 놓는 것입니다. 이 편광기 때문에 어느 길 정보가 사라지고 다시 간섭무늬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미 두 번째 빛살가르개를 통해 간섭이 있을 뒤에 어느 길 정보를 잃어버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 양자역학적 정보를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양자 지우개(Quantum Eraser)'라 부릅니다.
요컨대, 마흐-첸더 간섭계에서 편광기를 이용하여 어느 길 정보를 얻은 뒤 다시 추가적인 편광기를 이용하여 그 정보를 지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다만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이 실험장치는 실제의 양자지우개 실험은 아니고 광학장치를 이용하여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실험이 진짜 양자지우개 실험이 아닌 이유는 빛살가르개(빔가르개)에서 빛의 양(세기)이 절반으로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즉 레이저(1)에서 쏜 빛의 절반은 빛살가르개에서 반사되고 절반은 투과합니다. 두 번째 빛살가르개에서도 절반은 반사하고 절반은 투과합니다.
여기에서 '보강간섭'이나 '소멸간섭'이란 용어와 개념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됩니다. 파동이 지니는 특별한 속성으로서 간섭은 같은 위치에 둘 이상의 파동이 함께 놓일 수 있음을 가리킵니다. 파도1과 파도2가 만날 때 파도1의 가장 높은 곳(산)과 파도2의 가장 높은 곳(산)이 같은 위치에 놓인다면, 그 둘이 합해져서 더 높은 산을 이룹니다. 이것이 보강간섭입니다. 마찬가지로 파도1의 가장 낮은 곳(골)과 파도2의 가장 낮은 곳(골)이 같은 위치에 놓이면 그 둘이 합해져 더 낮은 골을 이룹니다. 이것도 보강간섭입니다. 이와 달리 한 파장 차이가 있어서 파도1의 가장 높은 곳(산)과 파도2의 가장 낮은 곳(골)이 같은 위치에 놓인다면 그 둘을 더해서 높낮이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소멸간섭입니다. 고전적 파동에서 간섭이라는 것은 전혀 신비스럽지 않은 현상입니다.
1802년 무렵 토머스 영이 겹실틈을 이용해서 빛의 경우 이와 같은 간섭이 일어남을 보이면서 빛이 일종의 파동이라는 믿음에 힘이 실렸습니다. 1870년대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빛의 일반이론을 만들면서 빛이 다름 아니라 전기장과 자기장이 공간속으로 퍼져나가는 일종의 파동이라는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자기파(electromagnetic wave)'입니다. 1888년 독일의 하인리히 헤르츠가 그 전자기파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라디오파입니다.
즉 빛은 전자기파라는 파동이고 빛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전적 파동이론을 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실제 고전적 광학에서 빛의 파동이론은 모두 이 고전적 파동이론에 속합니다. 이를 가지고 안테나도 만들고 전자기 회로도 만들고 라디오파도 만들고 라디오 송출도 하고 심지어 영상도 보내고 무선 통신도 합니다. 지금 마이크로파를 이용하는 이동전화 기술도 모두 이 범위 안에 있습니다. 전자공학이든 통신공학이든 이런 것을 아주 정교하게 다루는 기술과 이론은 엄청나게 발전해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이 모든 것이 철두철비 비양자(non-quantum) 이론으로서의 고전적 전자기 파동이론의 틀에서 모두 설명되고 다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양자역학이 개입할 여지는 없습니다. 마흐-첸더의 간섭계도 바로 이렇게 양자역학과 전혀 무관하게 고전 광학의 이론적 틀 안에서 개발되고 실용화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흐-첸더 간섭계는 그 자체로는 양자역학과 별개의 일입니다.
이것이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는 것은 단일 빛알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발전하면서부터입니다. 실험실에서 단일 빛알을 처음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1974년 이후입니다. 1974년 존 클라우저는 원자의 캐스케이드에서 방출되는 복사선이 단일 빛알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처음 밝혔습니다.
- Clauser, John F. (1974). "Experimental distinction between the quantum and classical field-theoretic predictions for the photoelectric effect". Phys. Rev. D. 9 (4): 853–860. DOI: https://doi.org/10.1103/PhysRevD.9.853
존 클라우저는 2022년 노벨물리학상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단일 빛알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 더 따져 물어야 하겠지만, 여하간 이 단일 빛알을 마흐-첸더 간섭계로 보낸다면 빛살가르개(반투명거울)에서 절반은 투과하고 절반은 반사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단일 빛알이 절반으로 쪼개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가능한 것은 오로지 1/2의 확률로 투과하거나 1/2의 확률로 반사하는 것뿐입니다. 확정적으로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하간 투과하거나 반사하는 것이 각각 확률 1/2로 주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정확히 겹실틈 실험의 상황과 같습니다. 겹실틈 실험에서도 두 실틈을 동시에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로지 1/2의 확률로 왼쪽 실틈을 지나거나 1/2의 확률로 오른쪽 실틈을 지날 뿐입니다.
이미 논의한 것처럼, 마흐-첸더 간섭계에서 반사와 투과의 위상변화를 잘 따져보면 두 번째 빛살가르개에서 윗쪽 스크린으로 가는 빛 즉 [u2]와 [v2]는 소멸간섭하고 [u1]과 [v1]은 보강간섭하기 때문에 오른쪽 스크린에만 빛이 나타납니다.
이를 잘 볼 수 있는 가상실험실이 있습니다. 세인트앤드류 대학에서 만든 "눈으로 보는 양자역학 프로젝트(QuVis, The Quantum Mechanics Visualisation Project)"입니다.
먼저 마흐-첸더 간섭계에 단일 빛알을 보내는 실험입니다.
이 마흐-첸더 간섭계를 이용한 양자지우개 실험은 다음의 가상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상호작용 없는 측정(엘리추르-바이드만 실험)도 직접 시뮬레이션할 수 있습니다.
실제 실험실에서 할 수 있는 양자지우개 실험은 1982년에 제안되었다가 1992년에 성공했습니다.
- M. O. Scully and K. Drühl, “Quantum eraser: A proposed photon correlation experiment concerning observation and ‘delayed choice’ in quantum mechanics,” Phys. Rev. A 25, 2208 (1982).
- P. G. Kwiat et al., “Observation of a ‘quantum eraser’: A revival of coherence in a two-photon interference experiment,” Phys. Rev. A 45, 7729 (1992).
그런데 이 '양자지우개' 실험의 구체적인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흔히 말하듯,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법입니다. 매우 인상적인 이름을 붙였지만, 이 실험에서 지워지는 정보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소위 양자지우개 실험의 근본적인 가정이 입자-파동 이중성입니다. 양자 대상이 어떤 상황에서는 입자처럼 행동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근거가 박약한 형이상학적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간섭무늬 패턴이 보이면 파동이고 간섭무늬 패턴이 보이지 않으면 입자인데, 세 번째 편광기를 놓는가 여부에 따라 파동인지 입자인지를 고를 수 있으며, 세 번째 편광기를 통해 어느 길 정보를 갖는 입자의 어느 길 정보를 지울 수 있다고 잘못 설명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실험을 설명하는 과정에 자주 시간의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용이 있다는 부적절한 주장이 자주 등장하는데, 실상 그런 역향인과(retrocausality, backward causation)를 도입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이를 논의하는 물리철학자들은 "소위 '지연된 선택 양자지우개'는 아무 것도 지우지 않고 아무런 지연이 없다(The ‘Delayed Choice Quantum Eraser’ Neither Erases Nor Delays.)"라고 강조합니다.
- Johannes Fankhauser (2019). Taming the Delayed Choice Quantum Eraser. Quanta 2019; 8: 44-56. https://doi.org/10.12743/quanta.v8i1.88
- R. E. Kastner (2019). The ‘Delayed Choice Quantum Eraser’ Neither Erases Nor Delays. Foundations of Physics (2019) 49:717–727. https://doi.org/10.1007/s10701-019-002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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