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대로 쏟아내는 후기, 막 던지는 질문하기, 제안해봅니다.
질문 및 토론
앎의 바탕 구도
작성자
neomay3
작성일
2019-12-01 18:56
조회
6456
마음대로 쏟아내는 후기와 질문 하기, 제안해봅니다.
세미나 때는 하기 어려웠던 질문, 때를 놓쳐서 부끄러워서 몰라서 혹은 알아서 발언 기회를 잡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막 쏟아내는 게시판으로 활용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제 바램입니다. ^^;
- 저의 후기
1장에 대해서 두 번, 2장은 3분의 1정도에 대해 한 번의 세미나를 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분들)는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유롭게 머리와 손이 가는대로 써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떨까요?
사실 세미나가 진행될 때는 질문도 주저주저 돼서 하기가 어렵고, 제가 시간을 잡아먹을 것 같기도 하고, 뭘 물어야할지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다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 맞는 말씀인 것 같기도 하거든요.
- 역사지평, 재밌다.
저는 ‘역사지평’ 부분의 글들은 너무나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좀 과장하자면 눈앞에 장면이 동영상으로 지나가는 느낌이랄까요. 입암정사(만활당)의 마당에서 뒷짐을 지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우주에 대해 생각했을 것 같은 여헌선생의 모습, 그리고 케임브리지의 매점에서 사온 노트에 첫 글씨를 써넣고 있는 뉴턴의 모습도 바로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 나는 왜 물리학을 어렵게 생각하는가
저는 물리학이 수학이나 화학 분야보다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곰곰히 생각을 해보면 그 이유는, 물리학이 현실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가정의 가정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학이나 화학은 아예 처음부터 수, 문자와 기호를 쓰기 때문에 현실상황이랄까 그런 것과 연결시킬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물리학은 사과나 스프링, 기차, 우주선 이런 실제의 사물을 등장시킨다는 거죠.
현실의 사물을 현실적이지 않은 조건에 두고 그 사물(의 특성과 상태)에 대해 얘기하는 바람에 제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물리학 사이에 부조화가 계속 발생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저의 ‘관념의 틀’이 계속 공격받기 때문에 힘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 질문
1, 2장 그리고 책 전반에 대해 막 던지는 질문도 추가합니다. 여헌선생은 당시 조선의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자신을 판단의 주체(余曰)로 삼으며 하나의 이(理)로 과거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여헌선생이 ‘예측’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 배경이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장회익선생님의 심학 1~10도는 ‘처음 상태’에서 ‘나중 상태’로 변화하는 원리가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대상의 상태가 변화하는 원리를 알고 예측을 할 수 있게 되면 그 사물을 이해했다, 그 사물의 본질을 알게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요?
반대하거나 이의가 있는 것은 조금도 아니구요. 왜 사는 걸까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많이 생각하지만,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림 1] "심학 제1도".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중에서.
여헌선생의 (과학)철학이 새로운 것이라면, 당시 혹은 그 이전의 조선시대와 동양에서는 사물을 이해하는 것, 사물의 본질을 아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그것이 좀 궁금해졌습니다.
당시에는 대나무의 본질을 알기 위해 대나무만 몇 날 며칠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알게 되기를 기대했던 것이 무엇이었을지도 좀 궁금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세상의 본질이 물이냐 불이냐 원자냐고 논했던 것을 보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느냐, 즉 본질이 무엇이냐를 이해의 척도로 삼기도 했던 게 아닐까 싶거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서양 철학에서는 ‘변화’에 대한 학문적 역사가 더 길고 깊었던 것인가해서 찾아보니, ‘변화에 대한 중국 철학’ 항목이 스탠포드 철학사전(https://plato.stanford.edu/index.html)에 딱 나오네요.
어제 세미나에서도 나왔지만, 여헌선생의 저작 중에 주역에 대한 책이 5권이나 된다고 합니다. 여헌선생께서 천지만물의 ‘변화’와 ‘예측’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하신 배경에 주역도 있었을까요? 주역의 팔괘를 보니 그런 생각도 들고. 그러고 보니 주역의 ‘역’이 변한다는 뜻이네요. 세미나 때 나왔던 얘긴데 제가 놓쳤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주역에서 다루는 변화는 인간의 삶과 운명에 대한 것이기때문에 여헌선생께서는 '천지만물의 이'를 찾으려고 한 게 아닐까요. (네버엔딩 스토리가 될 것 같아서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
전체 641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공지사항 |
[자료] 유튜브 대담영상 "자연철학이야기" 녹취록 & 카툰 링크 모음 (2)
neomay33
|
2023.04.20
|
추천 2
|
조회 8116
|
neomay33 | 2023.04.20 | 2 | 8116 |
공지사항 |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강독모임 계획 안내 (1)
시인처럼
|
2023.01.30
|
추천 0
|
조회 7848
|
시인처럼 | 2023.01.30 | 0 | 7848 |
공지사항 |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정오표 (10)
시인처럼
|
2022.12.22
|
추천 3
|
조회 10237
|
시인처럼 | 2022.12.22 | 3 | 10237 |
공지사항 |
[공지] 게시판 카테고리 설정에 대해서 (4)
시인처럼
|
2022.03.07
|
추천 0
|
조회 9350
|
시인처럼 | 2022.03.07 | 0 | 9350 |
공지사항 |
새 자연철학 세미나 보완 계획 (3)
시인처럼
|
2022.01.20
|
추천 0
|
조회 10157
|
시인처럼 | 2022.01.20 | 0 | 10157 |
공지사항 |
새 자연철학 세미나 - 안내
neomay33
|
2021.10.24
|
추천 0
|
조회 9890
|
neomay33 | 2021.10.24 | 0 | 9890 |
626 |
<자연철학 강의> 서평 올립니다. (3)
박 용국
|
2024.01.29
|
추천 1
|
조회 315
|
박 용국 | 2024.01.29 | 1 | 315 |
625 |
과학적 객관성에는 역사가 있다
자연사랑
|
2023.09.05
|
추천 3
|
조회 375
|
자연사랑 | 2023.09.05 | 3 | 375 |
624 |
과학은 진리가 아니라 일종의 믿음의 체계 (2)
자연사랑
|
2023.09.05
|
추천 1
|
조회 758
|
자연사랑 | 2023.09.05 | 1 | 758 |
623 |
물리학 이론의 공리적 구성
자연사랑
|
2023.08.30
|
추천 3
|
조회 668
|
자연사랑 | 2023.08.30 | 3 | 668 |
622 |
상대성이론의 형식체계와 그에 대한 해석의 문제 (6)
자연사랑
|
2023.08.29
|
추천 3
|
조회 959
|
자연사랑 | 2023.08.29 | 3 | 959 |
621 |
양자역학으로 웃어 보아요 (1)
시지프스
|
2023.08.28
|
추천 0
|
조회 796
|
시지프스 | 2023.08.28 | 0 | 796 |
620 |
[양자역학 강독 모임] 소감입니다. (1)
neomay33
|
2023.08.28
|
추천 2
|
조회 763
|
neomay33 | 2023.08.28 | 2 | 763 |
619 |
양자 얽힘과 태극도(음양도) 그리고 '양자 음양' (1)
자연사랑
|
2023.08.25
|
추천 3
|
조회 1716
|
자연사랑 | 2023.08.25 | 3 | 1716 |
618 |
수식 없이 술술 양자물리
자연사랑
|
2023.08.24
|
추천 2
|
조회 938
|
자연사랑 | 2023.08.24 | 2 | 938 |
617 |
0819 강독 마무리 토론회 발표용 (2)
시지프스
|
2023.08.19
|
추천 2
|
조회 642
|
시지프스 | 2023.08.19 | 2 | 642 |
neomay3님(눈사람님)의 질문에 대해 저의 의견을 적어 봅니다.
"장회익선생님의 심학 1~10도는 ‘처음 상태’에서 ‘나중 상태’로 변화하는 원리가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대상의 상태가 변화하는 원리를 알고 예측을 할 수 있게 되면 그 사물을 이해했다, 그 사물의 본질을 알게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라고 물어보셨는데, 제가 이해하기로 적어도 세 가지 접근에서 정확히 그렇게 보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발흥하여 이슬람으로 건너가 더 크게 확장되고 다시 12세기 유럽으로 유입되어 16세기까지 유럽의 대학에서 활발하게 토론되고 논의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에서 가장 큰 관심은 '운동 motus'였습니다. 실상 '변화'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뉴턴에 이르러 '운동'을 '위치의 운동 motus localis'에 국한시키기 시작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에서는 늘 '변화'를 해명하는 데 가장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둘째는 동아시아 성리학입니다. 주역이나 역경(이경)이 변화무쌍한 상황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점술과도 깊이 연관됩니다. 다만 주역은 개인이나 국가의 길흉화복의 예언하는 것뿐 아니라 자연의 온갖 변화무쌍한 것을 온전히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변화에 대한 예측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리학은 단지 주역이 아니라 공맹의 유학과 노장의 도교와 불교의 세계관을 통합하여 사실상 모든 것(인간의 성정, 사회의 운영원리, 음악과 예술, 해달별의 운행, 우주의 운명)을 포괄하는 종합적 사유입니다. 흔히 유학이라고 폄하하지만, 실상은 11세기에 주돈이(周敦頤 Zhou Dunyi)에서 시작하여 주희(朱熹 Zhu Xi)와 정이(程頤 Cheng Yi)가 도교적 형이상학과 불교 사상을 유학의 도덕철학과 결합하여 만든 유불선 통합의 체계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리(li)와 기(qi)의 개념과 음(yin)과 양(yang)의 조화를 통해 만물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주역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주희의 자연철학은 사실상 모든 대상과 영역을 다루는 엄청난 사유였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Zhu_Xi )
세 번째가 바로 17세기 이후 근대물리학입니다. 특히 동역학(dynamics)이라 부르는 세부 분야인데, 힘의 평형이나 물질의 구성을 다루는 다른 분야들과 달리, 구체적으로 운동과 변화를 해명하고 상태와 현상을 예측하는 데 주안점을 둡니다. 아이작 뉴턴이 당시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은 것은 빛의 새로운 이론을 만들고 반사망원경을 만든 것뿐 아니라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고 심지어 에드먼드 핼리의 혜성이 곧 다시 나타나리라는 놀라운 예측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미적분학을 만든 이유도 변화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수학적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적분학이라는 언어를 섭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도 가장 큰 관심을 변화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 고맙습니다! 막 던지면 답해주실 분이 계실 것 같았는데, 역시 자연사랑님께서 답을 해주시네요. ^^
무척 흥미로운 후기와 질문입니다. 이야기할 것이 무척 많은 좋은 이야기거리라 생각합니다.
짧은 시간에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하는 바람에 더 많은 분이 자신의 생각을 꺼내 놓는 데 방해가 된 건 아닌가 반성합니다.
장현광 선생이 어떤 동기로 <우주설>과 <답동문>의 혁신적인 논의를 하게 되었는가 살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문제일 듯 싶습니다. 장회익 선생님은 <자연철학강의>에서 "소를 찾아나서는 일"로서 마침 선생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신 장현광의 논의를 인용한 것이지만, 거기에서 시작하여 장현광의 사유와 주장을 더 깊이 파고 드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가령 '여헌학'이란 것이 있어서 말 그대로 장현광의 사유와 주장을 탐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http://www.yeoheon.or.kr/jang/index/index3.jsp)
여하간 '변화'라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고 그 변화를 추적하고 예측하고 파악하는 일이 장현광의 사유의 근간이란 점을 잘 지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답글, 지지 & 정리 고맙습니다~ 호응 없을까 걱정했거든요. ^^;
모임 때 해주신 코멘트는 도움이 많이 되던데요?! 넘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소개해주신 사이트에 가보니 구미에 여헌기념관이 있네요! 입암정사 사진도 있던데, 아주 좋아보이네요~ 기회되시는 분들은 가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어서) 실상 주역은 변화와 조화의 모든 것을 다루는 사유이자 철학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자연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고대 중국에서 발원하여 의미 있는 방식으로 진전을 이루었다기보다는 답습과 무비판적인 신성화와 신비주의화 때문에 현실성이 없는 사변에 머물고 말았다고 봅니다.
아래 링크는 중국 남경(난칭)대학 철학과에 올라와 있는 "주역의 자연철학"이란 논문입니다.
https://philo.nju.edu.cn/f4/54/c4692a128084/page.htm
장회익 선생님께서 <자연철학 강의>의 심우10도의 첫 그림을 여헌 장현광 선생에게서 가져오신 것은 과장해서 말하자면 실상 주역의 자연철학이라는 면면한 계보를 활용하시는 셈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자연철학 강의>는 바로 근대물리학으로 이어갑니다. 문제의식은 수용하되, 주역의 자연철학을 답습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 다르게 보면 근대물리학조차 답습하지 않습니다. 제가 모임에서 살짝 언급한 것처럼 물리학계에서는 온갖 잡다한 문제를 풀어내고 분석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만, 정작 자연철학적 사유는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 경험으로 말씀드리면, 물리학 강의 시간에 자연철학적 성격의 질문을 하면 교수들도 난감해 할 뿐 아니라 오래 전이기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지 말라고 핀잔을 듣기 일쑤였습니다. 난해한 문제를 풀어내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심오한 의미는 묻지 말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물리학과 수업은 늘상 어렵고 복잡한 계산과 개념이 난무하고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그 복잡한 개념과 계산 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즐거워 하거나 괴로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서울 세미나에 참석할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제2도 이야기도 더 깊이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다음 아산 모임에서 제3도가 무척 기대됩니다. 상대성이론이라는 낯설고 이상야릇한 이야기가 어떻게 자연철학 속에 녹아들지 궁금합니다.
아, 주역이 사람의 운명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는 사유군요. 주역이 자연철학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렇게 보니 좀 이해가 되네요. 장현광선생께서 주역을 그렇게 공부한 이유도 변화를 탐구하기 위해서였나봐요.
장회익샘께서 1장에 장현광선생의 이야기를 가져오신 것도 많이 이해가 됐습니다!
이제 남경대학(사이트)으로 가보겠습니다. ^^
주역 팔괘는 전후좌우로 방향을 나누고 상하로 또 나눠 팔방을 살핀 것이기 때문에 1차원 2차원 3차원을 함께 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기다가 시간 패턴도 포함한 게 역학이므로 유불선을 융합했던 조선 지식인들의 사유세계를 현대인들이 산술과 실험으로 비로소 여헌의 바람대로 하나둘 증명을 통해 수긍해가고 있는 거라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비합리적인 사고 태도를 벗어던지는 태도를 저도 꼼꼼히 배워야겠다고 또 다짐했구요. 그런데 지구촌에서 지금은 이런 철학이 마치 중국 것인냥 자타가 언급하지만 역학과 그 철학 및 역사는 동아시아 공동유산이고 동이족이 이어온 셈인데 중국의 것이라 표현하는 건 상당부분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는데... 축소되고 분단된 현실적인 F(이렇게 표현해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와 자기자신을 배우지 않는 무지랭이에게 버려져서 빼앗긴 과거와 현재와 심지어 미래까지 반영된 현상이라고 봅니다. 저는 어제 토의했던 수학과 과학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세히 정리해주셔서 복습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리를 하려고 들면 못할 거 같아서 '의식의 흐름에 따라' 막 썼습니다. ^^;
도움이 되셨다고 말씀해주시니 기쁘고 부끄럽네요.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서양에서는 동양의 철학을 그냥 "Chinese" 철학이라고 부르는구나 싶습니다.
neomay3님(눈사람님)이 언급하신 https://plato.stanford.edu/entries/chinese-change/는 "변화에 관한 중국 철학"이라기보다는 "주역의 철학"입니다. '주역 周易'을 '역경 易經'이라고 하는데, 중국어로 읽으면 Yìjīng(이칭)이라서 영어로 I Ching 독일어로 I Ging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뉴턴보다 더 빨리 미적분학을 만들어낸 라이프니츠는 꽤 일찍부터 주역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주역이 나온 것이 기원전 10세기 서주 시대쯤이고 전국시대에 더 널리 퍼졌다고 하니까, 3천년 전에 처음 등장한 것인데, 그 뒤로 온갖 방식으로 확장되고 재해석되고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포장되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스탠포드에서 제목을 잘못 달았네요. ㅋ 변화에 대한 중국의 철학을 주역 하나만으로 다 설명할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요. 궁금하긴 한데, 설명이 길던데 다 읽어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라이프니츠가 주역을 공부했다는 얘기, 첨 들었습니다. 재밌네요~
저는 의견이 다릅니다. 유학 하는 분들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과학사 하는 분들에게 주역과 관련된 것을 배웠고 또 영어 텍스트를 통해 공부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과학사 분야의 영어 텍스트를 선호하긴 합니다만, 스태펀드 철학 백과사전에서 제목을 잘못 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역'이 곧 '변화에 관한 중국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주역과 관련하여 독자적인 사유가 사실상 거의 없고 단지 중국 철학에 대한 주석 수준의 논의나 아니면 기껏 점집에서 개인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으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까지 포함시켜서 굳이 '동아시아'라는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 좀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양명학(심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일본의 성리학은 "일본의 성리학"이란 말을 붙여도 될 만큼 광범위하고 의미 있는 논의를 오랫 동안 해왔지만, 가령 조선은 내세우는 것이 기껏 사단칠정론이나 리기일원론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질문을 할수록 제 무지와 비논리적인 사고가 드러나는 것 같아요. ^^; 계속 질문해야할 것도 같기는 한데...
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한테는 엄청나게 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질문하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특히 질문을 글로 만들어 보는 것이 아주 중요한 중간단계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글을 쓰는 것도 논리적 사고를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점점 더 질문하는 일이 줄어들고 있고 질문하는 법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질문을 하는 이유는 모르고 있기 때문에 또는 이해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고 있다면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겠죠. 그러니 "질문을 할수록 무지가 드러난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 다음으로 질문에 답을 하고, 다시 그 답을 하는 과정에서 답하는 사람도 새로운 것을 배울 것입니다. 제가 지금 그러고 있습니다. 저야말로 엄청나게 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뭔가를 잘 알고 있어서 정답을 적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의 견해일 뿐입니다. 어쩌면 오랫동안 물리학을 공부했을 뿐 아니라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하고 심지어 동아시아 과학사도 열심히 공부하려 애써 왔기 때문에, 장회익 선생님의 <자연철학 강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가 제가 아닐까 하는 자만심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여하간 이 게시판에 남기는 저의 글은 단지 저의 견해와 관점일 뿐입니다.
지난 번 아산 모임에서 장회익 선생님께서 초급물리학을 1년 배운 뒤에 <자연철학 강의>를 읽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셨는데, 저에게는 <자연철학 강의>가 마치 저를 위해 쓰신 것처럼 문장 하나하나마다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지난 봄에 선생님 원고를 읽어드렸을 때와는 또 전혀 다른 느낌으로 감동하고 있습니다.
장현광에 대한 널리 알려진 논문집으로 <여헌 장현광의 학문 세계>가 있습니다. 2004년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가 4권으로 펴냈습니다. 그 중 1권에 우주론적 사유에 대한 논문들이 있습니다. (https://bit.ly/2Rmt07i)
여헌학연구회가 2015년에 낸 <여헌학의 이해 : 여헌 장현광의 학문과 사상>에 장현광의 학문에 대해 상세한 내용이 있습니다. (https://bit.ly/2PigCTp) 특히 "자연학, 인간학, 형이상학을 포괄하는 우주설"이란 제목의 장이 직접 관련되겠습니다.
지난 2018년에 장현광의 <우주설>의 한국어 완역본이 나왔습니다. (https://bit.ly/2ONMuQC) 지금은 전북대에 있는 이기복 교수께서 번역했는데, 저도 이기복 교수와 이런저런 친분도 있고 동아시아 과학사 한문원전 강독 모임에도 끼어서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장현광의 저작은 가령 <여헌집>을 보면 실로 방대함을 알 수 있는데, 거기에 <우주설>도 없고 <답동문>도 없습니다. <宇宙要括帖>은 목차만 있습니다. (https://bit.ly/2rfdIXu )
2016년에 나온 <원전으로 읽는 여헌학 : 여헌선역집>(여헌학총서 2)에 <태극설> <우주설> <답동문>의 원문과 번역이 실려 있습니다. (https://bit.ly/2rfjYyr)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새 글로 써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새 글’이기 때문에~ ^^
상세하게 논의 과정을 풀어주셔서 다시 읽으며 지난주 세미나 내용을 복기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참고해서 이해못했던 부분들을 차근차근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좋은 나눔 고맙습니다
neomay3님(눈사람님)이 수학보다 물리학이 더 어렵다고 얘기하시는 게 아주 흥미롭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수학은 구체적인 것을 최대로 제거하여 추상화시켜 버린 뒤, 그 추상화된 하늘 위에서 고준담론을 펼치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거친 사람이 아니라면 따라가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의 경우를 보면, 항상 추상적 기호가 감추고 있는 구체적 상황과 예를 먼저 생각합니다. "3+4"라는 낯선 기호는 여러 약속과 규칙을 잘 알아야 하지만, 인절미 세 조각 먹고 나중에 네 조각 더 먹으면 모두 몇 조각 먹은 거냐 하는 질문에는 누구나 쉽게 답할 수 있습니다.
가령 dx/dt 와 같은 낯선 기호를 이해하려면 극한이라든가 곡선의 기울기라든가 아주 작은 양(무한소) 같은 개념에 익숙해야 하고, 여하간 미분이라는 개념을 학습해야 합니다. 하지만, 고속도로에서 특정 두 지점 사이에서 평균 속도가 얼마인지는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고, 더더욱 순간적으로 속도가 얼마인가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구체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해가 쉽습니다.
물리학에서 수학과 달리 이러저러한 가정들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게 말하면, 추상적인 기호를 납득하고 다루기 위해서 상황을 설정하고 그 상황으로 구체화시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기호로 1/2 k x^2 어쩌구 쓰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렵지만, 용수철 끝에 달린 쇠공이 떨리는 모습으로 상상하면 이해가 더 쉬워집니다.
자연철학이라는 것이 갖는 특별한 지위가 있습니다. 자연철학은 수학이나 물리학보다도 훨씬 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고준담론입니다. 자연철학에 비하면 수학이 오히려 더 구체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공부하고 고민하고 세미나하고 강의한 '자연철학'에 속하는 지식과 개념들이 물리학보다 더 어렵습니다. 제가 어릴 때 물리학과에 진학한 이유도 인문학이나 다른 자연과학보다 더 단순하고 쉬웠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은 풀리는 문제만 풀기 때문에 암기할 것도 없고 생각도 단순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neomay3님(눈사람님)이 수학보다 물리학이 더 어렵다고 얘기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제 알겠어요. 저는 현실을 수학 공식으로 표현하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워서인 것 같습니다. 2장에 나오는 용수철 부분에서, 그운동을 표현하는 딱 맞는 것이 코사인함수라고 나오거든요. 그런가보다하면 이해 아닌 이해를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어떻게 이 운동을 코사인함수와 딱 맞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건 아무리 자세한 설명을 보더라도,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 같아요.
저는 현상을 일반화하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저항하는 것 같습니다. ^^;;
저는 수학을 언어로 배웠습니다. 일상어보다 더 자주 사용하고 편안한 언어입니다. 아마 어릴 적에 배웠기 때문에 편하게 쓸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물리적 상황을 서술할 때 수학이라는 언어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가령 용수철 운동을 표현하기에 딱 맞는 것이 코사인 함수라는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현상이 먼저 있고 나중에야 함수 같은 수학적 언어가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간 과장하면, 용수철 운동의 본질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곰곰 생각하다가 코사인 함수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나마도 진짜 용수철 운동은 코사인 함수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공과대학의 공학수학이나 수리물리학에서 배우는 내용을 보면 현실 상황이 훨씬 난해하고 코사인 함수만이 아니라 다양한 고급 함수들이 더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대신 사인 함수나 코사인 함수 하나가 아니라 그런 함수 여러 개 (심지어 무한개)를 사용하면 현실을 잘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푸리에 급수'입니다. 이것은 제4도에서 필요로 하는 '푸리에 변환'과 연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