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실재와 물리적 실재
도덕적 실재에 대해 김진우 선생님이 질문하신 것을 뒤늦게 보았습니다. 윤리학적 문제에 대해 김진우 선생님이 전문가이실 터라 제가 섣불리 의견을 달기가 주저됩니다만, 저의 생각을 짧게 적어보겠습니다.
도덕적 실재론(moral realism)은 대략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주장입니다.
[Paul Bloomfield (2001) Moral Reality]
(1) 존재론적 논제: 도덕적 선악은 사람들과 행위의 실재하는(참된) 속성이다.
(2) 인식론적 논제: 도덕성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창조되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3) 언어적 논제: 도덕적 언명은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다.
(4) 실천적 논제: 우리는 선한 것을 하려 애쓴다.
(참고: https://en.wikipedia.org/wiki/Moral_realism)
대개 도덕적 실재에 대한 논의는 물리적 실재와 구별됩니다. 선함이라든가 옳은 것이 실재한다는 주장은 가령 전자가 실재한다는 주장과는 직접 관련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령 폴 블룸필드의 책은 독특하게도 도덕성과 건강함의 유비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어서, 생명이 갖는 음의 엔트로피에 대해 상세하게 논의합니다. 결론적으로는 도덕적 실재를 물리적 실재로 환원할 수 없음을 논증하는 듯 하지만, 명확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적 실재론과 관련된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진화윤리학일 것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Evolutionary_ethics
찰스 다윈의 1859년 저서(<종의 기원>)보다 더 심각한 논쟁을 낳은 것은 1871년 저서(<인간의 유래>)입니다. 다윈은 자신의 자연선택이론에 기반을 두어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진화이론은 도덕과 윤리의 타락을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지닌 토머스 헉슬리가 <진화와 윤리>(http://aladin.kr/p/0n3zN)라는 책을 쓴 것은 이러한 당시의 논란을 직접 맞대응하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Huxley, Thomas Henry (1893). Evolution and Ethics
가령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의 인간 사회생물학이나 그것이 더 발전한 형태인 여러 형태의 진화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도덕성을 진화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도덕실재론과 비교하면, 진화윤리학은 매우 강한 도덕실재론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리적 실재론으로의 환원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진화윤리학의 주장들을 수용하는 듯 합니다.
저는 진화윤리학의 주장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도덕성이 단순히 자연선택과 진화의 소산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진화는 형질의 자연선택뿐 아니라 중추신경계 특히 뇌의 진화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뇌를 통한 판단은 형질의 자연선택과 달리 자율적인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도덕성은 물리적 실재뿐 아니라 생물학적 전개와도 독립적으로 형성되었으며 학습된다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도덕실재론의 주장들이 대체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장회익 선생님의 <자연철학 강의>의 전체적인 전개를 보면, 물리학에 기반을 둔 자연철학으로부터 생명에 대한 자연철학적 논의를 거쳐 의식의 문제를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도덕과 윤리의 문제로 연결되는 듯이 보입니다. 이에 대해 더 상세한 토론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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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논의의 흐름을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재 개념은 아직까지 알듯 말듯합니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전자라든가 빅뱅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과학적 실재론입니다. 이와 달리 과학의 목적은 볼 수 없는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이론적 개념이나 용어는 단지 훌륭한 도구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 '도구주의' 또는 '반실재론(anti-realism)'입니다.
도덕실재론은 저에게는 무척 어렵습니다만, 제가 이해하는 수준에서 의견을 말씀드리면, 도덕적 가치 즉 선함이나 옳음이 '전자'나 '빅뱅'처럼 정말 존재한다고 믿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1950년대에 엘리자베스 앤스콤(G. E. M. Anscombe 1919—2001))이나 필리파 풋(Philippa Foot 1920-2010)이 최근의 도덕실재론과 연결된다고들 합니다. 1950년대에 메타윤리학에서는 윤리적 기준이나 도덕적 가치가 모두 상대주의적이라는 생각이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앤스콤이나 풋은 이에 반대하면서 윤리와 도덕의 근간이 되는 선함이나 옳음이 단순히 관념상에 있거나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존재한다고 말한 셈입니다. (실상은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하겠지만 단순화시켜서 말한 것입니다.)
저는 과학실재론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 도덕실재론은 정말 난해합니다.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는 알 것 같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