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꼽문] 책새벽-화/금 : 『세계철학사 1』 2부 8장 (p.471-584)
모임 정리
책새벽-금
작성자
neomay33
작성일
2023-11-20 12:53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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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아카데미 온라인 책읽기 모임 '책새벽-화/금' 시즌2에서는 현재 『세계철학사 1』(이정우. 2011. 길) 2부를 읽고 있습니다.
매주 읽는 내용 중 참여하시는 분들이 꼽아주신 책꼽문과 질문을 모아 이곳에 정리해두려고 합니다. 책 읽으시는 데 참고해주시고요, 모임 공지는 웹사이트 맨 위 '일정' 메뉴를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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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목차
- 헬레니즘 시대
- 소크라테스 운동
§1. 회의주의의 발흥
- 아카데메이아의 회의주의
- 회의주의의 발전
§2. 진정한 쾌락을 찾아서: 에피쿠로스학파
- 에피쿠로스의 규준학
- 원자론적 세계관
- '클리나멘'의 문제
§3. 스토아철학 1: 헬레니즘 시대
- 스토아철학의 구도
- 스토아 논리학
- 스토아 자연철학
- 스토아 윤리학
- 공화정 로마에서의 스토아철학
- 로마의 영혼 키케로
§4. 스토아철학 2: 로마 제국 시대
- 비극적인 시대의 철학: 세네카
- 제국 로마 전성기의 스토아철학
8장. '삶의 기예'로서의 철학
p. 475-476
사회적인 활동들을 뒷받침해주던 정치적 단위들이 와해될 경우, 또는 활기찬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 대개 양극화가 발생한다. 한편으로는 다소 막연한 의미에서의 우주, 자연, 세계 같은 초월적 지평이 도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면으로 움츠러든 개인들 또는 소집단들이 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초월과 내면이 직접 연결되면서 그 사이에 존재하던 단위들이 증발하게 된다. 저 멀리 존재하는 초월과 내면 속으로 숨어들어간 자아/소집단이 그 사이에 존재하는 자연/사물 및 사회/역사를 건너뛴 채 직접 만나게 됨으로써 그 중간이 텅 비는 것이다.
과거에 폴리스에 부여되었던 '자족성'의 이상은 이제 개인과 우주로 양극화되고, 이 양극이 중간 매개 없이 직접 이어진다. 이런 식의 구도는 철학사에서 종종 나타나는 구도이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헬레니즘 시대가 이런 시대였다. 이런 구도는 로마적인 획일화가 지중해세계 전반에 퍼지면서 더욱 더 강화되기에 이른다.
이런 시대를 맞이해 철학자들도 한편으로 저 멀리 초월을 동경하는가 하면,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내면으로 또는 자신이 속한 소집단으로 도피한다. 나아가 구체적인 자연/사물 및 사회/역사를 건너뛰는 사유들이 대세를 이루면서 과학과 철학이 분리되기에 이른다. 철학은 과학적 탐구를 포기한 채 점차 종교의 성격을 띠고, 다른 한편으로 철학적인 비전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세계의 특정 부분에만 몰두하는 개별 과학들이 발달한다.
과학과 철학이 결합해 있을 때 사유는 높이 비상한다. 과학과 철학이 분리될 때, 과학은 국가와 자본주의 - 물론 이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 와 기술의 도구로 전락하고(극단적인 경우, 마루타 등으로 대변되는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끔찍한 비극들을 상기해보라) 철학은 주관적/개인적인 인생관, 가치관이나 집단적인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본래 의미에서의 철학이 아니라 이른바 "인생철학"만이 존재하게 되고, 학문적으로 설득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들기" 때문에 어떤 철학을 신봉하게 된다. 헬레니즘-로마 시대는 철학이 과학과 분리되면서 '인생철학'으로 전락한 시대이다.
p.478-479.
이 시대(헬레니즘 시대)는 국가와 학문이 결탁하기 시작한 시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철학은 창조적인 사유보다는 점차 주석, 개설, 문헌 정리 등으로 흐르게 된다.
.... 헬레니즘-로마 시대의 철학은 그 기본 성격에 있어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철학이었다. 이 시대는 세계를 명확히 이해하고픈 소망보다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고픈 소망이 압도하는 시대였다. 무엇보다도 '구원'을 갈구하던 시대였다. 철학이란 '생활의 양식', '삶의 기예'였다.
따라서 이 시대를 이론적 빈약함 때문에 폄하하기만 하는 것은 일면적 평가이며, 각도를 달리해서 이 시대의 철학자들이 실천적으로 그리고 후대의 표현을 빌리면 '실존적으로', 나아가 신체적으로 어떤 '철학적 삶'을 살았는가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p.485.
퀴니코스학파는 도피의 철학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이룬 성취가 하찮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철학적 삶'의 전혀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기성의 작위적 체계들로부터 어떻게 파격할 수 있는가를 자신들의 몸으로 보여주었다.
나아가 비현실적인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세계시민'이라는 관념을 제시함으로써 이후의 사상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퀴니코스 학파는 기성 질서에 대한 저항, 모든 작위적이고 위선적인 제도들에 대한 공격, 인간의 원초적/본래적인 모습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모든 사조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디오게네스와 퀴니코스 학파에 대한 애니메이션.(한글 자막 있음)
Video by TED-Ed, Director: Avi Ofer, Writer: William D Desmond. 2021. 1. 19.
§1. 회의주의의 발흥
p.489-490.
일반적으로 회의주의의 창시자는 에피쿠로스와 동시대인인 엘리스의 퓌론(BC360-272년)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회의주의는 흔히 '퓌론주의'로 불리기도 한다. ... 그는 "사물들은 존재하는 만큼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며(존재와 비존재에 차이가 없으며),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며,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는데, ...
회의주의자들이 공격했던 논적은 '독단주의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이 말로 아리스토텔레스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 등을 가리켰다. 훗날에는 기독교가 대표적인 독단주의로 지목된다. 회의주의의 핵심은 다음 구절에 담겨 있다.
"회의주의란 어떤 방식으로든 감각된 것들(phainomemena)과 생각된 것들(nooumena)을 대립시키는 능력이다. 이때 서로 대립하는 대상들과 생각들이 팽팽히 맞서기에, 우리는 판단중지(epochē)에 이르게 되며, 그로써 평온함(ataraxia)에 도달하게 된다." (PH, I, §8)
... 이런 상황은 '이율배반'이라 불린다. 그럴 때 우리는 진리에 대한 갈구 때문에 절망에 빠진다. ...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판단을 중지해버린다. 그때 우리는 '앎에의 의지'를 내려놓고 비로소 평온함을 찾게 된다.
p.496.
카르네아데스는 이율배반과 판단중지 그리고 영혼의 평온함으로 만족하는 기존 회의주의를 넘어 좀더 적극적인 철학을 구축하려 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개연성'의 인식론이라는 중요한 진전을 이룬다.
카르네아데스 역시 파악적 인상 즉 참된 지각을 여러 각도에서 비판했다. 그러나 카르네아데스는 이율배반을 통해 진리 주장을 정지시키기보다는 주장들에 '개연적인(probalilis)'이라는 개념을 부여함으로써 독단주의와 회의주의를 가르고 있는 강에 '정도(degree)'의 다리를 놓았다.
예컨대 얼마만큼의 쌀알을 쌓아야 '많은 쌀'인가? 얼마만큼의 돈을 가져야 '부자'가 되는가? 카르네아데스는 연속성/정도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중요한 논리적 진전을 보았고, 그런 진전을 토대로 진리를 개연성의 문제로 만들었다. 진리 주장들은 단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일정한 정도의 진리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2023년 11월 27일 업데이트)
§2. 진정한 쾌락을 찾아서: 에피쿠로스학파
p.502.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를 따라 인식의 규준을 감각에 두었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대비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섬세한 지각론이 존재하며, 플라톤과 달리 지각 자체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는 것을 강조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규준'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런 지각의 결과, 나아가 판단의 결과에 대한 정교한 논리학적 분석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각론을 논리학이 아니라 영혼론에서 다룬 것이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그런 논리학을 거부하고 지각 자체만을 인식의 규준으로 삼았다. 이 점에서 그 역시 헬레니즘 시대의 흐름 속에 있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여타의 인식론들과는 달리 이 감각을 '설명'하려했고, 이 설명을 위해서 원자론이라는 형이상학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사유의 새로운 분기점을 마련했다.
P.511-512.
세계가 인과에 지배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 행위의 원인은 그 스스로에게 있다. 즉,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원인인 것이다. ...
우리의 삶이 상당 부분 외적인 인과 메커니즘들에 의해 휘둘린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의 능력 특히 사유를 통해서 "모든 선택과 기피의 동기를 발견하고 (...) 사려 깊게 이성적으로 따져볼" 수 있으며, 이로써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들이 공통으로 열망했던 자족성('아우타르케이아')-현자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자족성의 가장 큰 열매는 자유(eleutheria)이다.’
p.516
에피쿠로스는 어떤 것을 미리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점에서 죽음을 미리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어리석다고 보았다. ...
현자는 양적으로 긴 삶을 원하지 않으며 단지 가장 즐거운 삶을 원할 뿐이기 때문이다. 현자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기쁜 삶의 향유일 뿐이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자유인은 죽음이 아니라 오로지 삶만을 사유한다.
§3. 스토아철학 1: 헬레니즘 시대
p.520.
제논은 철학을 '논리학', '자연철학', 윤리학으로 삼분 ... 이런 학문 분류는 예비학, 자연철학 및 형이상학, 윤리학 및 정치학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와 뼈대를 같이하나, '형이상학' 분야가 빠진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토아학파는 유물론 - 물론 구체적으로 어떤 유물론이냐가 중요하지만 - 을 견지했으며, 때문에 이들에게 자연철학과 형이상학이라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자연철학이 '제1철학'이었다.
스토아학파를 두드러지게 만드는 한 요인은 논리학(인식론, 언어철학 등을 포함)의 존재이다. '윤리'의 문제에만 천착했던 당대의 다른 학파들과 달리 스토아학파는 정교한 논리학을 발전시킴으로써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버금가는 수준의 사유에 도달할 수 있었다. ... 스토아학파는 정치적이고 현실 참여적이었다. 스토아 윤리학은 '의무'의 윤리학이었으며, 이 의무에는 의당 현실 참여가 포함되었다.
p.521.
스토아의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을 보기 전에 이 사유의 전체 구도 즉 존재론을 우선 볼 필요가 있다. 스토아 존재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존재'보다도 더 상위의 범주를 상정한 점이다. 이들은 '존재'를 'existence'로 보았으며, 이 실존 외에도 'subsistence'라는 것을 설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현실성만이 존재의 전부가 아니라 잠재성도 존재에 포함되듯이, 스토아 철학자들에게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실존'만이 아니라 '잠존'도 고려돼야 한다.
이들은 이 둘을 포괄하는 말로서 '무엇(ti)'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들에게 존재 즉 '실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곧 물체들이다. 물질과 물체는 극미에서 극대까지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잠존'이라는 존재 양식은 곧 '비물질체적인 것들'에 관련된다. 요컨데 이들에게 세계는 물체적인 것들의 실존과 비물체적인 것들의 잠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세 번째 범주를 따로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허구적인 것들의 범주이다.
p.525.
감각-인상이 지식으로 화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것은 'lekton’이다. ‘lekton’의 개념은 스토아 언어철학의 핵심이다.
소리와 말은 다르다. 단순한 물리적인 소리도 소리라 할 수 있지만, 오로지 분절된 소리만이 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말과 언어는 다르다. 말은 의미를 결할 수도 있지만, 언어는 반드시 무언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냥 소리를 내는 것과 말하는 것은 다르다. 소리를 내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과정이지만, 말하는 것은 무언가를/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되는 것들‘이 지시하는 것이 바로 이 무엇이다.
p.527.
스토아학파의 또 하나 결정적인 공헌은 '명제논리학'의 발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S is P'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며, 초점은 S와 P에 맞추어진다. 이 논리학은 기본적으로 'is'의 논리학, 즉 존재의 논리학이다. 그러나 명제논리학은 'S is P' 이외의 형식들을 다루며, 다양한 명제들을 다루기 때문에 명제논리학이다.
p.528.
스토아 철학자들은 또한 현대 식으로 말해서 양상논리학(modal logic)을 발전시켰다. 이는 제논과 함께 연구한 바 있는 메가라학파의 디오도로스가 공헌한 분야이기도 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양상론을 주로 진리론을 통해서 설명했다. ...
양상이란 특히 하나의 사태가 시간과 관련해서 가지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가능한 것은 그 어떤 시간에 성립하는 것이며, 불가능한 것은 어떤 시간에서도 성립하지 않는 것이며, 필연적인 것은 항상 즉 모든 시간에 성립하는 것이며, 필연적이지는 않은 것은 항상 즉 모든 시간에 성립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양상론은 이후 17세기에 라이프니츠에 의해 도약을 이루고 현대에 이르러 철학의 핵심 분야들 중 하나로서 연구되고 있다.
p.530.
"'fatum'이라는 말로 나는 그리스인들이 'heimarmene'라 부른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원인들의 질서/순서와 계열을 가리키지요. 원인이 원인에 연결되어 계속 무엇인가를 산출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항구적인 진리입니다. 결국, 생겨날 일이 아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에] 생겨나지 않은 것이고, 마찬가지로 본성상 자신을 생겨 날 것으로 만들어줄 원인들을 갖추지 못한 것은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알 수 있습니다. 'fatum'이 미신에서의 "fatum"이 아니라 자연철학의 그것임을. 그러니까 그것은 사물들/일들-왜 과거의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고, 왜 현재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왜 미래의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의 항구적인 원인인 것이죠."
『점술론』에서 키케로가 동생 퀸투스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위 구절은 스토아적 이법의 세계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 흔히 '운명'이라 번역되는 'fatum'은 그러나 문학적인 뉘앙스에서의 '운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주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합법칙성일 뿐이다. 여기에서 플라톤적인 목적론은 배제된다. 그것은 "원인들의 질서와 계역", 원인들의 연쇄 이외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부터 2023년 12월 4일 업데이트)
p. 535-536.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오늘날에서처럼 타자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이다. 그리고 이 전체-부분 관계는 부분들이 서로에 대해 가지는 관계 또한 함축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관계들 -'상대적 배치'- 을 잘 가져가는 것이다.
p.536.
스토아 철학자들의 범신론적이고 낙천주의적인 사상은 이들로 하여금 윤리를 직접 자연에 연결하도록 만들었다. "자연에 따라 살아라." 그렇다면 이들에게 인간의 자유는 어떤 것일까? 이들에게 자유는 결정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내가 자유롭다는 것은 내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결정성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내 삶이 혼미한 것은 내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나 자신이 어떻게 결정되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결정성에 무지한 데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 나온다. 그 결정성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나는 자연에 합치하는 훌륭한 행위를 할 수 있다. 훗날 스피노자가 정식화하듯이, "자유는 필연의 인식이다."
p.537-538.
이성의 자발성이란 오히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휘두르는 갖가지 외적 요인들과 내적 요인들을 정확히 인식해 그것들을 지배하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다. ...
자연의 이법은 최선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지 제멋대로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 자연=신이 때로 가혹하고 삶이 때로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은 이성을 통해 그 필연성을 터득해 나가고 그 깨달음을 통해 초연하게 살아갈 수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런 경지에 도달한 인물을 ‘현자’라고 불렀고, '스토아적 현자(stoic sage)'라는 이 개념은 서구 문명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p.538.
헬레니즘 시대의 다른 사조들과 마찬가지로 스토아학파 역시 철학의 궁극을 윤리학에 두었다. 이들에게 윤리의 핵심은 "자연을 따라 사는 것"이었기에, 윤리학의 토대는 자연을 파악하는 것이었고 특히 인간의 자연=본성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작업은 동물계 전체에 대한 이해와 그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특별한 위상에 대한 이해를 핵심으로 했다.
p.538-539.
에피쿠로스학파에 반대해서 스토아학파는 동물들이 처음으로 의식하는 것은 쾌락과 고통의 구분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이라고 보았다. 쾌락과 고통은 동물들이 타자들과 적합한 관계, 부적합한 관계를 맺었을 때 생겨나는 결과라고 본 것이다.
p. 542.
스토아 철학자들은 덕의 교육 가능성과 통일성을 강조한 면에서 소크라테스를 잇고 있다. 이들은 덕이 교육 가능하다고 보았다. 저열한 인간도 선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 현자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님을 함축한다. 또, 이들은 덕은 '완전할(perfectus)'때 진정 덕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곧 개별 덕들의 통일성을 함축한다. ...
물론 이들도 현실적으로 이런 경지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경지의 가능성을 믿으며, 인간이란 덕을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에게 행복과 불행의 진정한 기준은 덕과 악덕뿐인 것이다.
p.551-552.
이런 스토아적 엄격주의는 가치와 의미를 절대화함으로써 삶의 모범 답안을 용기 있고 일관되게 따르는 데에는 강점이 있지만, 계속 변화해가는 현실에 맞추어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창조해나가는 데에는 약점이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화정 말기에 각종 위기가 찾아왔을 때에도 카토 등 스토아주의자들은 오로지 공화정의 전통과 이상 - 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창조물이었음에도 - 만 지키려 했을 뿐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원칙'에의 충실함이 오히려 '정치적 상상력'의 부재를 가져온 것이다. 브루투스 등이 카이사르를 암살한 뒤에도 아무런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 역시 이들의 뇌리 속에 있는 강고한 관념, 즉 공화정 체제만 지키면 된다는 관념 때문이었다.
p. 555-556.
헬레니즘 시대는 폴리스라는 옷을 벗어버린 순수한 개인, 폴리스라는 집단의 한 부품이 아니라 (후대의 표현으로) '천부인권'을 가진 개인이라는 개념과 그것의 쌍으로서 국가, 성, 신분, 지역 등을 초월한 인류 보편이라는 이상이 도래한 시대였다.
후대의 용어로 말해 특수성과 일반성(헤겔)의 구도에서 개별성과 보편성(칸트)의 구도로 이행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맥락에서 '사해평등'이라든가 '사해동포주의'라든가 '인간정신의 상통', '영혼의 공감' 같은 개념이 등장할 수 있었다.
이런 측면을 보듬은 철학은 두 갈래로 나타났다. 하나는 이성적-철학적-공화국적 사유로서 스토아철학이 이를 대변하며, 다른 하나는 감정적-종교적-제국적 사유로서 기독교 사상이 이를 대변한다.
p.556.
스토아 철학은 신=자연의 섭리에 의해 지배되는 우주, 그 섭리를 각각 부여받은 생명체들, 특히 이성이라는 신적 성격을 부여받은 인간을 사유했다. 바로 이런 근거에서 이들은 세계를 거대한 하나의 도시로 보았으며, 이 단 하나의 도시의 보편성의 지평에서 ‘자연법’-퓌지스의 한 얼굴로서의 노모스-을 생각했다.
이 자연법은 실정법(관습법)을 초월해 존재하며, 말하자면 自然의 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命은 自然이 각 존재에게 준 역할이며, 스토아 철학자들이 그렇게 자주 세계/삶을 연극으로 그리고 인생을 이 연극에서의 역할로 비유한 것도 이 때문이다.
自然은 곧 運命이며 그 운명이 준 역할을 우리는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부조리한 것이라 해도 달게 연기해야 한다. 인간의 법이 아닌 신의 법에 따라서, 스토아적 현자는 ‘운명에의 사랑(amor fati)’에 따라 사는 인물이다.
p.565.
키케로가 볼 때 유익함은 때로 도덕적 선과 충돌하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인상일 뿐이다. "도덕적으로 악한 것이 있는 곳에 유익함이란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키케로의 전략은 "외견상 유익한 것처럼 보이는 것" 그러나 이런 식의 구분이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 . . 그는 스토아적 원칙론을 되풀이할 뿐, 이런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지 못한다.
아름다운 것을 이야기하기는 쉽다. 추하고 악하고 부조리한 것과 정면으로 대결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이 저작(『의무론』)이 도덕철학적 측면에서 뛰어난 작품임은 분명하며, 서구의 교육과 교양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2023년 12월 11일 업데이트)
§4. 스토아철학 2: 로마 제국 시대
p.567-568.
공화정 시대에 '왕'이라는 말은 기피의 대상이었고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집정관조차도 반드시 두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나 공화정이 무너지면서 이제 왕(황제)이라는 관념은 점차 현실적인 무엇으로 다가왔다. ...
더 결정적으로는 카이사르가 '신 율리우스'로 불리기 시작했을 때 결국 공화정의 근본 원칙은 붕괴했다. 이 명칭은 옥타비아누스의 작품이었고, 그 자신은 자연스럽게 "신의 아들"이 되었다. ...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의 귀에 살그머니 속삭였던 것도 바로 이런 '세계 제국', '황제', '신의 아들/딸' 같은 관념들이었다. 이런 관념들은 망나니였던 안토니우스에게조차 섬뜩한 것이어서 한동안 그는 클레오파트라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그 역시 공화국의 교육을 받고 자란 인물이었기에.
p.568.
'왕=대사제'라는 신정이 부활했고, 더 나아가 마침내 '황제=신'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권력자들이 알렉산드로스를 흉내 내면서도 좀체 넘지 못했던 선이 마침내 깨진 것이다. 이것은 로마의 핍박을 받던 지중해세계의 다양한 민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자신들을 이끌어줄 왕, 구세주-유대인들의 말로는 '메시아'를 갈망했다.
알렉산드로스와 디오게네스가 그랬듯이, 로마의 '황제'와 피압박 민족들의 '구세주'는 시대의 갈망에 대한 상반된 그러나 매우 흡사한 이미지("신의 아들")의 응답을 구성했다. 그러나 황제이든 구세주이든, 시대는 사유가 아니라 믿음을, 철학이 아니라 종교를 원했다. 이제 아테네 같은 폴리스나 로마 같은 수도 공화국 수도가 아니라 동방적인 신정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알렉산드리아가 시대의 장소가 된다.
이 모든 변화들이 철학의 발달에는 부정적인 변화였다. '제국'과 '종교'는 철학의 발전을 억압한다. 제국은 사유의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고, 종교는 사유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국은 통일성/일원성에 의해 뒷받침되며 따라서 사상 역시 일원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원적 사상은 흔히 종교의 형태를 띤다. 제국의 신은 자연히 유일신이어야 하며, 또는 신'들'이 존재할 경우 그들은 반드시 피라미드=위계를 이루어야 한다.
큰 제국에서든 작은 국가에서든 종교의 지배는 철학의 부재를 가져온다. 철학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이미 확립되어 있는 "진리"에 주석을 달아 그것을 정당화해주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리스 사유가 이룩한 빛나는 높이는 헬레니즘 시대에 한 차례 전락했고, 이제 제국 로마의 시대에 이르러 다시 한 차례 더 전락하게 된다. 종교의 그림자 아래로 들어간 철학이 훗날 이 그림자로부터 온전하게 빠져나오기까지는 무려 1,5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p.577-578.
에픽테토스는 철학을 영혼을 치유해주는 행위로 생각했다. 철학자는 영혼의 의사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철학을 철저하게 실천적 맥락에서 이해한다. ... 에픽테토스의 평생의 주제는 노예로 살 것인가,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 무엇보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 우리를 힘겹게 하는 것은 어떤 사태가 아니라 그 사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네가 바라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안달하지 말라. 일어나는 일들이 그대로 (자연에 따라) 일어나기를 바라라.” 이런 인식을 가지지 못할 때 삶은 몹시 힘겨운 것으로 다가온다. ...
우리는 주어진 역할을 최대한 잘 연기함으로써 덕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주체의 의지, 결단, 선택이 중요하다. ... 무지를 깨달아 지혜를 얻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야만 ‘이성적 선택‘을 통해 선한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때에만 우리는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에픽테토스가 권장하는 것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홀로 산책하며 너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라.”
p.581.
... 지중해세계 전체가 그리스화되었다. 폴리스가 소멸해감과 동시에 그리스 문화는 보편화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이 이렇게 "과거의 영광을 먹고 살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그 창조적 수명을 다했다는 것을 뜻한다.
과거의 영광을 반추한다는 것은 곧 현재의 빈약한 창조성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말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철학은 지중해세계 전체로 퍼져갔지만 동시에 쇠락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p.582.
헬레니즘-로마 시대가 점차 진행되면서 철학은 양극으로 갈라졌다. 이 시대는 전통적인 공동체의 정체성이 무너지면서 '개인'이라는 존재가 등장한 시대였다. 이 개인은 두 가지 상반된 방향으로 나타났다. 그 하나는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접고서 내면으로 또는 작은 '우리'로 움츠러든 개인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에는 금기시되었던 초월적 권력의화신을 추구한 개인이었다.
전자는 디오게네스와 에피쿠로스로 상징되는 이 시대의 상당수 사상가들에게서 볼 수 있고, 후자는 알렉산드로스, 로마의 군벌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로마 황제라는 존재로서 구현되었다. 이에 따라 철학 역시 양극화된다.
(8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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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2』 5장.하늘과 땅 사이에서. (p.301-37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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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2』 4장. '도'를 찾아서 (p.189-29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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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2』 3장. 기의 세계: 신체, 생명, 문화 (p.129-18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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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2』 2장 '역'의 사유 (p.61-12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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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2』 여는 말 & 1장 동북아세계의 형성 (p7-6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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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 『세계철학사 1』 11장 (p.687-75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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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 『세계철학사 1』 2부 9장. 구원의 갈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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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 『세계철학사 1』 2부 8장 (p.471-58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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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may33 | 2023.11.20 | 1 | 703 |
감사합니다. 키케로(퀸투스)의 말을 읽으면서 '아모르 파티(amor fati)'가 생각났습니다. fati는 fatum의 소유격입니다.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에서 말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사랑이 체념주의나 운명론이 아니라 우주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합법칙성을 따라가라는 의미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엉뚱할지 모르지만, '아모르 파티'라는 제목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이승윤 버전을 추천합니다.)
라틴어로 '파툼(fatum)'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헤이마르메네(εἱμαρμένη)를 키케로는 '오르디넴 세리엠쿠에 카우사룸(ordinem seriemque causarum)' 즉 원인의 질서와 연쇄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스토아 학파의 '파툼'에서 말하는 '원인' 내지 '인과'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사건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물체들 사이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두 물체, 두 사람, 두 생명 사이의 관계인 셈입니다. 냉정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문학적인 뉘앙스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Meyer, Susan Sauvé, 'Chain of Causes: What is Stoic Fate?', in Ricardo Salles (ed.), God and Cosmos in Stoicism (Oxford, 2009). https://doi.org/10.1093/acprof:oso/9780199556144.003.0004
니체도 그런 말을 했군요! 철학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 같네요. 당연하겠지만요. ^^ 저는 이 파툼이 '코스모스'같은 건가 해서 찾아보니, 코스모스는 우주, 우주의 질서 같은 의미로 피타고라스가 처음 썼더군요.
공유해주신 글로 가서 초록을 보니, '코스모스'라는 상위 원리가 'fatum'이라는 하위 원리에 의해 돌아가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비유하자면 고전역학 : 뉴턴의 운동방정식 = 코스모스 : 파툼. 이런 식으로요. 딱 들어맞지는 않곘지만, 재밌을 것 같아서 한 번 써봤습니다. ^^;
『세계철학사』 책꼽문 p.502-531 업데이트 했습니다.
『세계철학사』 책꼽문 8장 p.532-566 업데이트 했습니다.
『세계철학사』 책꼽문 8장 p.567-584 업데이트 했습니다. (8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