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질문] 성리학적 자연철학도 대물지식의 추구가 아닐까요?
(* 이 글은 2021년 10월 28일에 자연철학 세미나에서 다룰 질문으로 올렸던 글입니다. 이상하게 이 글에만 자꾸 스팸 댓글이 달려서, 그 글을 지우고 여기에 새로 올려 놓습니다. *)
저는 장회익 선생님께 오랫 동안 배웠고 특히 사유하는 방법을 깊이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경로를 통해서 접하게 된 동아시아 과학사를 염두에 두면서 뭔가 상보적인 관점을 갖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열흘쯤 전에 쓴 글에서 "동아시아의 자연철학적 사유도 단순히 '대생지식'에 함몰된 것이 아니라 분명히 '대물지식'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탐구한 사람들이 면면히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홍대용이 양반 신분이면서도 혼천의를 제작하고 방정식 이론을 학습하여 주해수용과 같은 저서를 남긴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갈릴레오가 <천문대화>와 <새로운 두 과학>에서 살비아티, 사그레도, 심플리치오 세 명의 화자들의 대화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간 것처럼,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실옹과 허자의 대화로 무한우주론과 지구설(地球說), 지전설(地轉說), 지동설(地動說)을 말하고 우주론적 상상을 이어간 것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라고 썼는데, 거기에 이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동아시아의 자연철학도 대물지식의 추구가 아닐까요?
제대로 공부하기에는 너무 많고 방대한 성리학 중에서 제가 어깨너머로 배운 것은 소위 '동아시아 과학사'입니다. 4년 정도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의 동아시아 과학사 원전강독수업에 나름 열심히 참석하여 배워보려 애썼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잡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제가 참석한 강독수업에서 읽고 이야기 나눈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격치여론>, <공제격치>, <물리소지>, <보만재총서>, <역학의문>, <오주연문장전산고>, <의산문답>, <임원경제지>, <우주설>, <주자어류>, <천공개물>, <황극경세서>, <일암연기>, <매월당문집>. 물론 전체를 다 읽은 건 아니고 주요 부분을 발췌하여 한 학기 분량 정도에 맞추어 구성원들이 돌아가면서 읽는 것이어서, 제 이해 정도는 많이 얕습니다. 특히 과학사가 아니라 사서삼경이나 기타 일반적인 문헌들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기 때문에 제가 가진 인상과 느낌은 매우 제한되고 일면적이라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를 너그러이 감안해 주시길 바라면서 저의 좁은 소견머리로 드리는 질문은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충분히 대물지식이 의미 있는 흐름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격물치지를 중시 여기는 성리학의 사유에서 사람의 도리와 같은 것을 주로 보는 대신 자연의 흐름과 '리(理, li)'에 주목하는 자연철학적 측면을 본다면, 성리학적 자연철학이야말로 대물지식을 강하게 추구해 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리(理, li)'는 현대의 동아시아 언어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물리(物理)', '지리(地理)', '생리(生理)', '법리(法理)' 등은 물론이거니와 "그럴 리가 없어"라는 일상어에서도 '리'가 파고들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다름 아니라 과학에 기반을 둔 자연철학의 추구와 사실상 같다고 믿고 있습니다.
(추가: 장회익 선생님의 글에서도 '격물치지'에 대해 언급되고 있지만, 제가 질문하는 것은 동아시아 전통 학문 전체가 아니라 성리학적 자연철학에 대한 것입니다. 동아시아 학문에서 어떤 접근은 격물치지를 통해 올바른 삶과 사회의 면모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지만, 또 다른 접근들은 유럽의 자연과학(더 정확하게는 자연철학)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사물(특히 천문학과 화학)에 대한 탐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의 질문은 동아시아 학문 전체가 아니라 그 중 일부로 볼 수 있는 성리학적 자연철학이 대물지식의 추구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장회익 선생님께서 대인지식, 대물지식, 대생지식의 의미를 분석하신 것을 과장하여 도식화하면, 서양의 지식은 대물지식이고 동양의 지식은 대생지식이라서 추구해 온 것이 다르다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애초에 동양과 서양을 구별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처럼 아주 오래 전부터 서양화하려고 애써온 문화권에서는 전통과 '근대화'가 언제나 후자의 승리로 이어져 왔고, 동양과 서양의 구별은 자주 전통과 근대화(현대화)의 대립과 연결되어 왔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과학적 사유'는 16-17세기 유럽에서 소위 세 가지 R, 즉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으로 연결되는 합리적 사유입니다. 이것이 계몽사조로 이어지고 다시 19세기에 실질적 의미의 전문과학분야의 정립으로 이어졌고, 일본을 필두로 동아시아에서 급격하게 수용하려고 했던 '과학'이 바로 이것과 연결됩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 사유에서 '리'를 추구하던 맥락이 끊겨버리면서 생경한 science가 이를 대치해 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아시아 과학사의 여러 문헌들을 어깨 너머로 배워보니 동아시아의 자연철학이야말로 매우 강렬한 대물지식이며, 더 나아가 '앎'과 '삶'이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던 문화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질문은 동양과 서양의 구별이 가능한지 그리고 필요한지 하는 것입니다.
어쭙잖게 포스크콜로니얼리즘의 계보에서 과학사를 공부할 기회가 있었는데, 가령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오리엔탈'이란 개념 자체가 유럽의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구성적 개념임을 강조했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시 꺼내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저는 19세기말 제국주의와 열강이 동아시아로 속속 들어와 침략전쟁을 할 때 널리 퍼졌던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을 오래 해 왔습니다. 꽤 전에 한예종에서 <동서과학사상비교>라는 제목의 교양강의를 했었는데, 그 때 저는 '동서'의 구별은 언제나 상대적이고 관계적임을 강조했습니다. 제가 만나본 인도의 학자들은 자주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곤 했습니다. 인도나 터키는 동양인가, 서양인가 묻는다면 대답이 쉽지 않습니다.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은 서남아시아(흔히 중동(中東 Middle East)이라고 잘못 지칭되는), 그 중에서도 아라비아 반도, 이란, 이라크 지역이거나 이슬람과 연관된 지역입니다. 즉 유럽에 비하여 동쪽에 있을 뿐이라서 가령 동아시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개념입니다. 가령 괴테의 <西東詩集>(West-östlicher Divan)에서 '동양'은 페르시아 지역의 문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럽 안에서도 '동'과 '서'가 갈립니다. 동유럽과 서유럽의 거리는 기독교 안에서도 정교회와 가톨릭/프로테스탄트의 거리만큼 먼 것 같습니다. 1054년에 동방정교와 서방가톨릭이 갈라진 뒤로도 더더욱 그러했지만, 그 전에도 이미 비잔틴제국의 후예와 로마제국의 후예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동'과 '서'를 구별하는 것이 유익하고 필요한 일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것이 결코 쉽지도 않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일이 아니라는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이 의문을 더 쉽게 풀어내지 못할 것 같아서, 일단은 여기에서 멈추고자 합니다. 이 의문은 새 자연철학 세미나 내내 다시 되돌아오고 되돌아오고 되돌아올 주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와 연관된 세 번째 질문은 간단하게 적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조지 무어가 1903년에 <윤리학의 원리 Principia Ethica>에서 논박하려 한 자연주의 윤리학에 대한 비판입니다. 흔히 사실과 당위의 구별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이 문제를 처음 체계적으로 논의한 철학자는 데이비드 흄입니다. [Is–ought problem] 흄이 28살 때 발표한 <인간본성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In every system of morality, which I have hitherto met with, I have always remarked, that the author proceeds for some time in the ordinary way of reasoning, and establishes the being of a God, or makes observations concerning human affairs; when of a sudden I am surprised to find, that instead of the usual copulations of propositions, is, and is not, I meet with no proposition that is not connected with an ought, or an ought not. This change is imperceptible; but is, however, of the last consequence. For as this ought, or ought not, expresses some new relation or affirmation, it's necessary that it should be observed and explained; and at the same time that a reason should be given, for what seems altogether inconceivable, how this new relation can be a deduction from others, which are entirely different from it. But as authors do not commonly use this precaution, I shall presume to recommend it to the readers; and am persuaded, that this small attention would subvert all the vulgar systems of morality, and let us see, that the distinction of vice and virtue is not founded merely on the relations of objects, nor is perceived by reason."
"무엇이 이러저러하다"라는 관찰이나 주장이나 언명으로부터 "무엇이 이러저러해야 한다"라는 명제를 끌어내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소위 '사실-가치 문제'로 확장되었습니다. [ Fact–value distinction] 무어가 <윤리학의 원리>에서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이름으로 비판한 것은 이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가령 과학철학, 수학철학, 언어철학에서 여러 연구를 남긴 분석철학자 힐러리 퍼트남이 주장한 것처럼 사실-가치의 이분법적 구별은 무너진 지 오래입니다.
Putnam, Hilary. The Collapse of the Fact/Value Dichotomy and Other Essay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가치와 독립된 사실이 따로 있다거나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는 가치가 있다는 믿음은 가령 "과학의 가치중립성 신화"만큼이나 오래된 잘못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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